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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교와 서원, 조선시대 교육 (군역면제, 사림정치, 서원철폐)

by qnwkdjaak 2026. 3. 23.

향교와 서원

 

얼마 전 아이 학교 설명회에 다녀왔습니다. 담임 선생님이 교육과정을 설명하는 동안 옆자리 어머니가 귀에 속삑였습니다. 여기 수학 선생님이 좀 약하대요. 다른 학원 알아봐야 할 것 같아요. 설명회가 끝나기도 전에 학원 정보 교환이 시작됐고, 저도 모르게 귀를 기울이고 있었습니다. 집에 오는 길에 그 어머니가 알려준 학원 이름을 검색하고 있는 제 모습을 발견하고 잠깐 멍했습니다. 학교 선생님 말씀은 절반도 기억 못 하면서 학원 후기는 꼼꼼히 읽고 있었으니까요. 그런데 이 풍경이 조선시대에도 똑같이 있었다는 걸 향교와 서원을 공부하면서 알게 됐습니다.

향교의 군역면제 혜택과 본질 상실

향교는 조선시대 국가가 각 지역에 설치한 공립 교육기관이었습니다. 여기서 향교란 고려 말부터 조선시대까지 유교 이념 교육과 과거시험 준비를 담당했던 지방 관학을 의미합니다. 전국에 300개가 넘는 향교가 있었고, 강원도만 해도 26개 고을마다 향교가 세워져 있었습니다(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향교에 다니는 학생을 교생이라 불렀는데, 이들에게는 군역 면제라는 파격적인 혜택이 주어졌습니다.

요즘으로 치면 국공립 학교를 다니면 군대를 안 가도 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이 혜택이 오히려 향교를 망가뜨렸습니다. 학문보다 군대를 피하려는 사람들이 몰려들었고, 교실은 채워졌지만 공부는 뒷전이 됐습니다. 저도 이 대목에서 한참 멈췄습니다. 고등학교 때 제가 공부했던 이유를 솔직하게 떠올려보면, 배움이 좋아서보다 친구들보다 뒤처지기 싫어서, 부모님 실망시키기 싫어서였던 시간이 훨씬 많았습니다.

수능 끝나고 나서 공부한 내용이 거의 남아있지 않다는 걸 몇 년 뒤에 깨달았을 때 허탈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토록 열심히 했는데 남은 게 없다는 느낌. 향교 교생들이 군역 면제만 바라고 이름만 올려놓았던 것과 제가 점수만 바라고 공부했던 것이 다르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형식은 있는데 본질이 빠진 공부라는 점에서요.

향교에서는 사서(四書)와 오경(五經)을 기본 교재로 사용했습니다. 사서오경이란 유교 경전의 핵심으로, 사서는 논어·맹자·대학·중용을 뜻하고 오경은 시경·서경·역경·예기·춘추를 가리킵니다. 이 외에도 소학, 가례, 문묘, 고문, 사기 등을 배웠습니다. 교육 내용 자체는 체계적이었지만, 학생들의 동기가 학문이 아닌 군역 회피에 있다 보니 실제 학습 효과는 떨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향교의 선생님은 교관이라 불렀는데, 국가에서 파견하거나 지역 자체에서 임명했습니다. 학생 수는 각 지역의 크기에 따라 정해져 있었고, 학생 나이는 보통 16세 이상이었습니다. 향교 졸업은 과거시험 합격을 의미했습니다. 여기서 과거시험이란 조선시대 관료를 선발하던 국가 시험으로, 소과(생원시·진사시)와 대과(문과)로 나뉘었습니다. 입신양명(立身揚名), 즉 몸을 일으켜 이름을 떨치는 것이 양반 자제의 목표였고, 그 수단이 과거 급제였습니다.

서원의 등장과 사림정치의 중심

조선 중기가 되면서 양반 자제들이 향교를 떠나 서원으로 몰려갔습니다. 평민들도 향교에 들어오기 시작하자 양반들이 자기들만의 공간을 만들었다는 측면도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향교가 더 이상 진지한 배움의 공간이 아니었기 때문이기도 했을 겁니다. 공교육이 흔들리면 사교육이 자리를 채운다는 공식이 500년 전에도 작동했던 겁니다.

저도 학창 시절 학교 수업보다 학원에서 더 집중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학교에서는 30명 넘는 아이들이 한 교실에 있으니 선생님이 제 수준에 맞춰줄 수가 없었고, 학원은 그나마 비슷한 수준끼리 모아놓고 집중적으로 가르쳐줬습니다. 지금 아이도 학교 수업은 따라가는데 심화 문제는 못 푼다며 수학 학원을 보내고 있습니다. 그때 서원으로 향하던 조선 유생들의 마음이 이런 것이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더 깊이, 더 제대로 배우고 싶은 마음.

서원은 지역 유림들이 만들어 운영한 사립 교육기관이었습니다. 여기서 유림이란 유교를 학문적 기반으로 삼는 지방 사림 세력을 뜻합니다. 강원도 최초의 서원인 오봉서원이 1556년 명종 11년에 설립됐고, 이어서 춘천의 문암서원, 도포서원, 원주의 칠봉서원과 도천서원이 세워졌습니다. 전국적으로는 경상도에 275개의 서원이 있었던 것에 비해 강원도는 14개에 불과했습니다(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이는 강원도 영동 지역에서는 향교 중심의 교육이 끝까지 유지됐기 때문입니다.

서원 학생은 원생이라 불렸고, 생원·진사가 되거나 초시 합격자가 입학할 수 있었습니다. 학생 수는 처음에는 10명 정도였는데, 너무 늘어나자 20명으로 제한했습니다. 학생들은 기숙사인 동재와 서재에서 일정에 따라 생활하며 공부했습니다. 향교보다 입학 기준이 높았고, 교육 수준도 깊이 있었습니다.

서원의 공간 구성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 강학공간: 학문을 닦고 연구하는 강당과 동재·서재
  • 제향공간: 선현에게 제사를 지내는 사당
  • 유식공간: 인간과 자연이 조화롭게 소통하는 누각

옥산서원의 경우 역락문(亦樂門)이라는 정문 이름이 인상적이었습니다. 논어 학이편의 "벗이 있어 멀리서 찾아오면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有朋自遠方來 不亦樂乎)"에서 따온 이름입니다. 군자가 되겠다는 비장한 이름도 아니고, 학문의 깊이를 자랑하는 이름도 아니라 함께 배우는 기쁨을 새긴 이름이었습니다. 저는 이 대목에서 꽤 오랫동안 멍하니 있었습니다.

아이 친구들이 집에 놀러 오면 저는 왜 공부는 안 하고 논다고 눈치를 준 적이 있습니다. 주말인데도 학원 숙제가 있다며 친구를 일찍 돌려보낸 적도 있고요. 그때 아이 표정이 생각납니다. 친구랑 더 놀고 싶은데 억지로 책상 앞에 앉는 그 표정. 함께 배우고 함께 자라는 즐거움이 공부의 뿌리라는 걸 조선 유생들은 문 이름으로 새겨놓았는데, 저는 그걸 아이에게서 빼앗고 있었던 건 아닌가 싶었습니다.

서원철폐와 교육의 본질

서원이 처음 세워졌을 때의 정신은 분명히 좋았습니다. 자율적인 학문 공동체, 깊이 있는 탐구, 사람과 사람 사이의 유대.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서원은 붕당 정치의 온상이 됐고, 군역 면제를 노린 허수아비 학생들이 몰려들면서 향교가 걸어간 길을 서원도 따라갔습니다.

서원은 공론(公論)을 생산하는 곳으로 힘을 행사했습니다. 여기서 공론이란 사림들이 형성한 공적 여론을 뜻하는데, 처음에는 국가의 중요한 정책이나 이념에 대한 의견을 모아 조정에 전달하는 역할이었습니다. 그러다 붕당 정치가 심해지면서 "이렇게 하면 좋겠소"라는 제안이 "이렇게 해야 한다"는 명령으로 바뀌었습니다. 1689년 송시열이 사망하고 30년이 지나자 송시열을 기리는 서원 설립 청원이 무려 100개나 올라왔습니다. 서원이 학문보다 정치 세력의 거점이 된 겁니다.

서원의 폐단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사액서원(賜額書院), 즉 국가에서 인증하는 서원이 되면 향교처럼 토지와 노비를 하사받고 군역을 면제받는 혜택이 있었습니다. 학생이 많이 들어가면 군역을 피하는 수단이 됐고, 서원에 주어진 토지가 늘어나면서 대지주가 되어 농민들에게 수탈을 가했습니다. 제사 비용도 인근 백성들에게 전가됐습니다.

결국 흥선대원군은 1871년 서원 철폐를 단행했습니다. 전국에 600여 개가 넘던 서원 중 단 47개만 남기고 모두 철폐했습니다. 조선 최고의 학문 연구 기관으로 불리던 서원이 완전히 무너진 겁니다. 비리와 불법이 적발된 곳은 모두 철폐했고, 반발하는 유생들은 강제 진압됐습니다.

저는 이 대목에서 지금 제가 아이를 보내고 있는 학원이 생각났습니다. 처음 보냈을 때는 아이가 흥미를 가졌으면 해서였는데, 어느 순간부터 목표가 다음 시험 점수로 바뀌어 있었습니다. 선생님이 좋아서 다니는 게 아니라 성적표 숫자 때문에 다니고 있었습니다. 향교가, 서원이 걸어간 그 길을 지금 우리도 조금씩 걷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옥산서원에는 원생들이 지켜야 할 규칙이 담긴 '이원규(吏院規)'가 남아 있습니다. 모두 늘SK 규칙이 있는데, 핵심만 추리면 이렇습니다.

  1. 사서오경과 소학·가례를 근본으로 삼아 독서할 것
  2. 국가 법규를 따르고 성현의 가르침을 지킬 것
  3. 몸으로 체득하고 마음으로 깨달아 실천할 것
  4. 조용히 각 방에 거하며 독서에 정력을 쏟을 것
  5. 제사를 경건히 봉행하고 서로 선행에 힘쓸 것

서원 유생들의 생활 규칙을 읽으면서 솔직히 숨이 막혔습니다. 각자 방에 조용히 있으면서 오로지 독서에만 집중해야 했고, 공부 외의 이유로 다른 방에 가서 잡담을 나누는 것도 금지됐습니다. 허락 없는 외출도 안 됐고, 보름마다 강당에 모여 공부를 점검받았습니다.

저는 중학교 때 기숙사 학교를 잠깐 다닌 적이 있습니다. 밤 10시에 소등이고, 주말에도 자습이 있었습니다. 그때 저는 석 달을 버티다 결국 집에 보내달라고 했습니다. 너무 힘들었거든요. 그런데 서원 유생들은 그보다 훨씬 엄격한 규칙을 몇 년씩 버텼습니다. 차이가 뭐였을까 생각해봤습니다. 제가 기숙사에서 버티지 못한 건 그 생활을 누가 시켜서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서원 유생들은 스스로 원해서 들어간 곳이었습니다. 배움에 대한 간절함이 달랐던 겁니다.

향교와 서원을 공부하면서 결국 드는 생각은 하나였습니다. 제도가 문제가 아니라 태도가 문제라는 것. 국립이냐 사립이냐, 학교냐 학원이냐보다 왜 배우는가가 먼저라는 것. 조선의 유생들은 그 질문을 가지고 있었는데, 저는 그 질문을 아이에게 한 번도 제대로 던져준 적이 없었습니다. 설명회에서 받아온 학원 이름 목록보다 그 질문이 먼저였는데 말입니다.

오늘 저녁에는 아이한테 물어봐야겠습니다. 너는 왜 공부하고 싶어? 대답이 뭐가 나올지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저도 그 질문에 제대로 답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 그래도 그 대화가 학원 정보 검색보다는 나을 것 같습니다. 500년 전 조선 유생들이 역락문을 통과하며 나눴을 그 대화처럼요.


참고: https://www.youtube.com/watch?v=H5XRGfZVpj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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