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42년 10월 1일, 조선어학회 회원 33명이 일제 경찰에 체포되었습니다. 죄목은 '치안유지법 위반', 즉 독립운동 혐의였습니다. 이들이 한 일은 단 하나, 우리말 사전을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일반적으로 한글은 세종대왕이 만든 위대한 문자라는 사실만 알고 있지만, 제 경험상 그 한글이 일제강점기에 얼마나 간신히 살아남았는지는 잘 모르는 분들이 많습니다. 저 역시 이 이야기를 접하기 전까지는 한글날을 그냥 공휴일 정도로만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조선어학회 사건을 알고 나니, 지금 제가 쓰는 이 글자 하나하나가 누군가의 목숨 위에 세워진 것임을 깨달았습니다.
한글이라는 이름의 탄생과 조선어학회
'한글'이라는 단어는 세종대왕 시대부터 쓰인 말이 아닙니다. 일제강점기가 시작된 지 3년이 지난 1913년, 국어학자 주시경이 처음 만든 말입니다. 여기서 '한글'이란 '한나라 글', 즉 우리나라 글을 줄인 말로, 후에 '하나', '크다', '바르다'라는 의미가 더해졌습니다(출처: 한글학회). 제가 처음 이 사실을 알았을 때 충격이었습니다. 당연히 오래전부터 쓰던 이름인 줄 알았는데, 나라를 빼앗긴 시대에 저항의 의미로 만들어진 말이었다니요.
주시경은 1911년 제자들과 함께 우리나라 최초의 조선어 사전 편찬을 계획했습니다. 이 사전의 이름은 '말모이'였습니다. 말모이란 '말을 모은 것'이라는 순우리말로, 이 단어가 훗날 '사전'을 뜻하는 우리말의 어원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1914년 주시경이 돌연 사망하면서 사전 작업은 중단되었고, 이후 15년간 침체기에 빠졌습니다.
1929년, 주시경의 제자들이 다시 모여 조선어연구회(후에 조선어학회로 개칭)를 만들고 사전 편찬을 재개했습니다. 이때 핵심 인물이 된 사람이 이극로입니다. 이극로는 독일 베를린 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한 엘리트였지만, 유학 중 영국 지배 하의 아일랜드에서 게일어 대신 영어가 공용어로 쓰이는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았습니다. 쉽게 말해, 모국어를 잃은 민족의 현실을 직접 목격한 것입니다. 귀국 후 그는 조선어학회에 합류해 우리말 사전 편찬에 평생을 바쳤습니다.
조선어학회는 전국 팔도의 사투리를 수집하기 위해 학생들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방학 때 고향으로 돌아가는 중등학교 이상 학생들에게 '시골말 캐는 잡지'라는 공책을 나눠주고, 각 지역에서 쓰는 방언을 수집해 오도록 했습니다. 1년 9개월에 걸친 작업 끝에 1936년, 조선어학회는 '사정한 조선어 표준말 모음'을 발표했습니다. 이는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로 표준어를 체계적으로 정리한 어휘집이었습니다.
옥중에서도 지켜낸 사전 원고
1942년 9월 5일, 함경남도 홍원경찰서에 조선어학회 회원 정태진이 체포되었습니다. 학생의 일기장에서 "국어(당시 일본어를 뜻함)를 썼다가 혼났다"는 문장이 발견되었고, 일제는 이를 빌미로 정태진을 독립운동 혐의로 몰았습니다. 20여 일간의 고문 끝에 정태진은 "조선어학회가 독립을 원하는 민족주의 단체"라는 자백을 했고, 이를 근거로 일제는 1942년 10월 1일 조선어학회 회원 33명을 검거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조선어학회 사건'입니다(출처: 독립기념관).
제가 이 대목에서 가장 충격받은 건, 사전 원고까지 모두 압수당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13년간의 노력이 물거품이 될 위기였습니다. 회원들은 혹독한 고문을 당했고, 이윤재와 한징은 옥중에서 목숨을 잃었습니다. 최현배는 치안유지법 위반 내란죄로 4년 형을 선고받았습니다. 최현배의 증언에 따르면, 일본이 패전하기 사흘 전 사형 집행 날짜가 확정되었다고 합니다. 만약 광복이 사흘만 늦었다면, 그들은 살아 돌아오지 못했을 것입니다.
1945년 8월 15일 광복 후, 조선어학회 회원들은 풀려났지만 사전 원고의 행방은 묘연했습니다. 그런데 8월 17일, 경성역(현 서울역) 역장으로부터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경성역 창고에 조선말을 풀이한 원고뭉치가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400자 원고지 26,500여 장 분량의 사전 원고가 재판 서류 뭉치 속에 섞여 버려진 채로 발견된 것입니다. 제 생각엔, 이건 정말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습니다. 조금만 늦었어도, 일본군이 증거 인멸을 했다면, 지금 우리가 쓰는 국어사전은 존재하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원고를 되찾은 조선어학회는 1947년 '조선말 큰 사전' 제1권을 출간했고, 1957년 전체 6권을 완간했습니다. 총 164,125개의 표제어가 수록된 이 사전은 현재 우리가 쓰는 국어사전의 시작이었습니다. 조선어학회는 이후 한글학회로 이름을 바꾸고, 지금까지 우리말 연구와 보급 활동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광복 직후의 혼란과 일본군의 반격
광복 소식은 갑작스러웠습니다. 1945년 8월 15일 정오, 일본 천황의 '항복 방송'이 나왔지만, 당시 조선인 대부분은 그 내용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일본어로 된 어려운 표현 때문이었습니다. 독립운동가 함석헌은 이날을 "해방은 도둑같이 뜻밖에 왔다"고 표현했습니다. 제가 이 표현을 처음 봤을 때, 정말 씁쓸했습니다. 그토록 기다리던 순간인데, 정작 그 순간이 온 줄도 몰랐다니요.
광복 다음 날인 8월 16일, 서대문형무소 앞에는 가족들이 모여들었습니다. 옥문이 열리고 독립운동가들이 나왔지만, 그들의 모습은 처참했습니다. 고문으로 등이 굽고, 부축이 필요할 정도로 몸이 망가진 상태였습니다. 어머니가 아들을 겨우 알아보고 통곡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저는 이 장면을 상상하면서, 사전 하나 만들겠다는 마음으로 그 고문을 버텨낸 사람들이 정말 대단하다고 느꼈습니다.
하지만 광복의 기쁨은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8월 17일, 일본군이 다시 언론을 장악하고 경성 곳곳에 헌병까지 설치했습니다. 광복 직후 2,600여 명이었던 조선 주둔 헌병이 한 달 만에 16,000여 명으로 6배 이상 늘어났습니다. 여기서 '헌병(憲兵)'이란 군대 내 질서를 유지하고 민간인까지 단속할 수 있는 특별한 권한을 가진 군인을 뜻합니다. 일본군은 "항복한 것은 연합국이지 조선이 아니다"라는 논리로, 여전히 조선인을 통제하려 했습니다.
더 비극적인 사건도 있었습니다. 1945년 8월 24일, 일본에서 조선으로 귀국하던 강제 동원 피해자들을 태운 수송선 우키시마호가 일본 해상에서 폭발했습니다. 일본은 지뢰 때문이라고 주장했지만, 훗날 인양된 선체 바닥의 구멍은 안쪽에서 바깥 방향으로 뚫려 있었습니다. 쉽게 말해, 폭발이 배 내부에서 일어났다는 증거였습니다. 수천 명의 조선인이 광복된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바다에 수장되었습니다. 제 생각엔, 이 사건은 일본군의 의도적인 학살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하지만 지금까지도 일본 정부는 공식 사과나 진상 규명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조선어학회 회원들이 목숨 걸고 지켜낸 우리말입니다. 하지만 요즘 우리 스스로 우리말을 무너뜨리고 있는 건 아닌가 싶을 때가 많습니다. '버카충', '편점', '인간관', '남친', '여친' 같은 줄임말이 일상화되고, 욕설이 감탄사처럼 쓰이며, 영어와 한국어를 뒤섞은 표현들이 아무렇지 않게 통용됩니다. 일반적으로 언어는 시대에 따라 변한다고 하지만, 제 경험상 지금은 변화가 아니라 파괴에 가깝습니다. 한글을 업신여기는 조선 사람들을 보며 탄식했던 사람이 외국인이었다는 사실이, 지금 우리에게도 똑같이 적용되는 건 아닌지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한글날은 단순한 공휴일이 아닙니다. 누군가의 목숨 위에 세워진 날입니다. 영화 '말모이'를 다시 보고, 아이에게 이 이야기를 전해야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우리가 당연하게 쓰는 이 말과 글이 얼마나 많은 희생 위에 있는지를요.
참고: https://www.youtube.com/watch?v=JN_i9SgmGfQ
https://www.youtube.com/watch?v=AwoNdcQy_to
https://www.youtube.com/watch?v=uzdQKOrUv1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