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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무과 과거제도 (응시자격, 시험과목, 격구)

by qnwkdjaak 2026. 3. 15.

조선시대 무과 과거제도

 

대학 졸업 후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던 시절, 친구들과 '조선시대에도 공시가 있었을까?'라는 우스갯소리를 나눈 적이 있습니다. 저는 그때 막연히 '칼 잘 쓰는 사람 뽑는 시험 정도 아니었을까' 생각했었습니다. 그런데 조선시대 무과 과거제도를 자세히 들여다본 후, 제 생각이 얼마나 단순했는지 깨달았습니다. 조선의 무관이 되려면 활도 잘 쏘고 말도 잘 타야 했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했습니다. 사서오경(四書五經)과 무경칠서(武經七書) 같은 경전을 외우고, 심지어 경국대전이라는 법전까지 꿰고 있어야 했습니다. 문과 무를 모두 갖춘 인재를 요구했던 조선의 무과는 생각보다 훨씬 체계적이고 전문적인 시험 제도였습니다.

조선시대 무과 응시자격과 망과의 양면성

조선시대 무과는 법제상으로는 양인(良人) 이상이면 누구나 응시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조선 전기에는 실제로 양반 자제들이 대부분을 차지했습니다. 양반들은 갑사(甲士)나 별시위(別侍衛) 같은 귀족 친위 군대에서 근무하다가 무과에 응시하는 경로를 밟았고, 국가도 이를 적극 장려했습니다. 여기서 갑사란 조선시대 중앙군 중 하나로, 주로 양반 자제들로 구성된 정예 부대를 의미합니다. 쉽게 말해 왕실과 수도를 방어하는 핵심 군사 조직이었습니다.

그런데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같은 전쟁이 터지자 상황이 급변했습니다. 국가는 공을 세운 사람에게 신분을 불문하고 무과 급제를 허용했고, 심지어 적의 머리 하나를 베어오면 원칙적으로 천민이었던 사람도 과거 응시 자격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저는 이 대목에서 전쟁이라는 극한 상황이 신분제에 균열을 냈다는 사실이 인상 깊었습니다. 조선 후기로 가면서 이런 천민 출신 급제자가 늘어났고, 그 결과 조선의 엄격한 신분제가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망과(罔科)'라는 제도의 이면에는 씁쓸한 현실이 있었습니다. 망과란 무과 정시에서 정원을 대폭 초과하여 많은 인원을 뽑는 것을 말합니다. 숙종 18년에는 무려 18,251명을 뽑았다는 기록이 있습니다(출처: 조선왕조실록). 국가 입장에서는 전쟁 후 재정이 바닥난 상황에서 무과 급제자들에게 쌀이나 연포(綿布, 화폐 대용 직물)를 받고 변방 근무를 면제해 주는 식으로 수입원을 마련했습니다. 저는 취업 준비할 때 자격증을 여러 개 따놓고도 막상 쓸 곳이 없어서 서랍에 넣어둔 경험이 있는데, 조선시대에도 이런 허탈함이 있었구나 싶었습니다. 급제는 했지만 관직은 없어서 평생 '백패(白牌)'로 늙어가는 사람들이 수두룩했습니다.

그럼에도 망과에는 긍정적인 측면도 있었습니다. 천민이 무과에 급제하면 본인은 관직을 못 얻더라도, 아들과 손자 세대에서는 생원·진사 시험이나 문과에 응시할 수 있는 길이 열렸습니다. 자신은 평생 혜택을 못 보더라도 자식 세대를 위해 기꺼이 그 길을 택한 사람들이 있었다는 겁니다. 부모님이 저를 위해 희생하신다는 말을 들으면서도 그 무게를 제대로 느끼지 못했던 제게, 이 대목은 묘한 죄책감을 안겨주었습니다.

무과 시험과목: 무예와 강서의 결합

무과 시험은 크게 무예 시험과 강서(講書) 시험으로 나뉘었습니다. 무예 시험에는 목전(木箭), 철전(鐵箭), 편전(片箭), 기사(騎射), 기창(騎槍), 격구(擊毬) 등이 있었고, 시대에 따라 유엽전(柳葉箭), 과녁, 조총, 편추 등이 추가되었습니다. 여기서 목전이란 나무로 만든 화살촉을 사용하는 활쏘기로, 288m(240보) 거리에서 얼마나 멀리 쏘는지를 평가했습니다. 반면 편전은 애기살이라 불리던 짧은 화살을 사용해 130보(약 156m) 거리의 작은 과녁을 정확히 맞추는 능력을 시험했습니다. 쉽게 말해 목전은 '파워'를, 편전은 '정확도'를 보는 종목이었습니다.

제가 처음 이 내용을 읽었을 때 가장 놀라웠던 건, 단순히 '활 잘 쏘는 사람'을 뽑는 게 아니라 무예의 본질을 이해하고 몸에 익힌 사람을 가려냈다는 점입니다. 예를 들어 기창(騎槍) 시험에서는 말을 타고 달리면서 긴 창으로 허수아비를 찌르되, 자세가 올바르지 않으면 명중해도 점수를 주지 않았습니다. 기사(騎射) 시험에서는 말의 속도까지 측정했는데, 이를 위해 누수관(漏水官)이라는 차비관이 물시계(漏壺)로 시간을 재며 감독했습니다. 여기서 누수관이란 시험장에서 시간을 측정하는 실무 관원을 뜻합니다. 응시생이 활 쏘기에만 집중하느라 말을 천천히 달리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장치였습니다.

그런데 더 흥미로운 건 강서 과목입니다. 무과 복시에서는 사서오경 중 한 권, 무경칠서 중 한 권, 병서인 『통감』·『병장』·『경제육전』 중 한 권, 그리고 『경국대전』을 부분 구강(口講, 책 일부를 낭독)하는 시험을 봤습니다. 저는 군인이면 체력과 전술이지, 유교 경전은 왜 외우나 싶었는데, 읽다 보니 이해가 됐습니다. 싸움터에서 판단을 내리고, 부하를 다스리고, 명령을 문서로 전달하고, 전략을 세우려면 글을 읽고 쓸 줄 알아야 했을 겁니다. 몸만 강한 사람이 아니라 머리도 쓸 줄 아는 사람이어야 했던 겁니다.

문과를 숭상하는 사상이 고조된 16세기 이후에는 무사들조차 무예 연마를 꺼리게 되었고, 이는 무과 시험의 간소화로 이어졌습니다. 조선 후기로 가면서 무과 시험은 한두 가지 무예만 선택적으로 시험 보는 방식으로 바뀌었고, 격구 같은 어려운 종목은 아예 폐지되었습니다. 『속대전』에는 초시와 복시에서 목전·철전·편전·기사·기창·조총·편추 중 1~2개만 시험 본다고 규정되어 있습니다(출처: 한국고전번역원).

격구: 사라진 최고 난도의 무예

격구(擊毬)는 무과 전시의 마지막 시험 과목이었습니다. 말을 타고 채 막대기로 나무 공을 쳐서 구문(毬門)에 넣는 무예로, 페르시아에서 시작해 중국을 거쳐 삼국시대에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고려시대에는 최고의 인기 스포츠였고, 조선시대에도 성행했습니다. 여기서 격구란 마상(馬上, 말 위)에서 하는 격구와 땅에서 하는 격구 두 가지가 있었는데, 궁궐에서 행해지던 격구는 대부분 땅에서 하는 격구였을 가능성이 큽니다. 쉽게 말해 오늘날 하키나 폴로(Polo)와 비슷한 형태였습니다.

세종은 격구를 군사의 무예 훈련, 특히 마상무예 훈련에 효과적이라고 생각해 무과와 도시(都試, 군관 대상 승진 시험)에 채택했습니다. 하지만 당시 신하들은 격구를 단순한 놀이 정도로 여겨 반대했습니다. 세종은 이를 무릅쓰고 『병조육전』에 격구를 명문화했고, 이후 『경국대전』에도 격구의 시취 방법이 정리되어 규정되었습니다. 격구 시험은 매우 복잡했습니다. 응시생이 말을 타고 공을 치되, 배지(背持)·기필(起筆)·비(飛)·수양수(竪仰手)·방미(放尾) 같은 정해진 동작을 순서대로 정확히 수행해야 점수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저는 이 대목을 읽으면서, 이건 체조나 피겨스케이팅처럼 정확한 동작 하나하나를 평가하는 시험이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격구는 난도가 너무 높았습니다. 성종 21년 무과 시험에서는 단 한 명도 합격하지 못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16세기 이후 문과를 숭상하는 분위기가 퍼지면서 무사들이 무예 연마를 꺼리게 되었고, 격구를 제대로 배우는 사람이 사라졌습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같은 전쟁 상황에서는 조총 같은 간단한 무기로 빨리 인원을 충원해야 했기 때문에 격구의 중요성이 더욱 떨어졌습니다. 그 결과 효종대를 끝으로 『조선왕조실록』에서 격구를 실시했다는 기록이 사라졌고, 『속대전』에는 격구가 정식 무과 과목에서 제외되었습니다.

다행히 정조대에 편찬된 『무예도보통지』에 『경국대전』에 규정된 격구가 그림으로 기록되어 있어서, 지금도 그 시취 방법을 짐작이라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저는 격구 이야기를 읽으면서 묘하게 씁쓸했습니다. 페르시아에서 시작해 고려 최고 인기 스포츠였던 격구가 조선을 거치면서 점점 사라졌다는 겁니다. 기술이나 무예나 언어나, 아무도 익히지 않으면 그냥 사라지는구나 싶었습니다. 가르치는 사람도 없고 배우는 사람도 없으면 수백 년 된 것도 한 세대 만에 끊길 수 있다는 게 격구를 보면서 실감났습니다.

조선시대 무과 과거제도를 자세히 들여다보고 나니, 무관이라는 직업이 생각보다 훨씬 복잡하고 넓은 역량을 요구했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몸도 머리도 담력도 필요했고, 거기에 더해 경전까지 꿰고 있어야 했습니다. 지금으로 치면 체력도 되고 공부도 되고 법도 알고 전략도 짤 줄 아는 사람이어야 했던 겁니다. 저는 학교 다닐 때 체육을 잘하는 친구들이 공부는 안 해도 된다는 분위기가 있었고, 솔직히 저도 그런 시선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조선시대 무관은 활도 잘 쏘고 말도 잘 타면서 유교 경전까지 읽어야 했습니다. 문무를 겸비하는 게 당연한 기준이었던 겁니다. 제가 가지고 있던 그 선입견이 꽤 부끄러워졌습니다. 사극에서 갑옷 입고 나오는 무관의 모습이 이제는 전과 다르게 보입니다.


참고: https://www.youtube.com/watch?v=jr5XAPjudLc
https://www.youtube.com/watch?v=3DiTciU9Eqo
https://www.youtube.com/watch?v=avWdhUGSt4c
https://www.youtube.com/watch?v=ijd6GaqE1N4
https://www.youtube.com/watch?v=yCtSNet8pRQ
https://www.youtube.com/watch?v=5hehl1fqbPU
https://www.youtube.com/watch?v=lhYMYw0Oj2I
https://www.youtube.com/watch?v=ASC7uMp7HcY
https://www.youtube.com/watch?v=_VbWt12lmM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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