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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과거시험 (응시 절차, 부정행위, 급제 후)

by qnwkdjaak 2026. 3. 14.

조선시대 과거시험 응시절차

 

취업 준비하면서 채용 공고 알림을 하루에 수십 번 확인했던 기억이 납니다. 정보를 늦게 알면 기회를 놓칠 수 있다는 불안감 때문이었습니다. 조선시대 과거시험도 비슷했습니다. 왕이 갑자기 별시를 열면 서울에 사는 사람은 바로 알지만 지방 유생은 며칠 후에야 소식을 듣고, 그 사이 정원이 다 차버리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제가 이번에 조선시대 과거시험 자료를 읽으면서 가장 놀란 건, 시험 제도의 형식이 아니라 그 안에서 사람들이 보인 행동 패턴이 지금과 너무 닮아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응시 원서 하나 내는 데도 집안 배경을 네 대나 증명해야 했고, 시험지 한 글자 잘못 올려 쓰면 탈락이었으며, 합격 후에도 자리가 없어서 몇 년씩 대기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조선시대 과거시험 응시 절차: 4대 조 관직 증명부터 시작

조선시대 과거시험을 보려면 먼저 농명(籠名)이라는 사전 등록 절차를 거쳐야 했습니다. 여기서 농명이란 시험 보기 전에 자신의 신원을 미리 등록하는 과정을 의미합니다. 요즘으로 치면 수능 원서 접수와 비슷하지만, 그 내용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복잡했습니다. 응시자는 사주단자(四祖單子)와 보단자(保單子) 두 가지 서류를 제출해야 했습니다. 사주단자에는 본인의 성명, 본관, 거주지는 물론이고 아버지, 할아버지, 증조할아버지, 외할아버지 등 4대 조의 관직과 이름을 모두 적어야 했습니다. 보단자는 유품(6품) 이상 관직을 지낸 사람이 작성하는 신원보증서였습니다(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저는 수능 원서 낼 때 이름이랑 주민번호 몇 자리만 입력하면 끝이었는데, 조선시대 응시생들은 집안 내력을 네 대나 소급해서 증명해야 했습니다. 4대 조 안에 관직을 지낸 사람이 없으면 어떻게 했을까요? 중종 이후에는 지방 응시자는 서울에 있는 수령 관원 3명, 서울 응시자는 3사(사헌부·사간원·홍문관) 관원 3명의 추천을 받아야 했습니다. 이 규정은 능력으로 관리를 뽑겠다는 과거제도의 본래 취지와 달리, 시작부터 집안 배경이 걸림돌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농명을 마치면 응시자는 시험지인 명지(名紙)를 미리 받았습니다. 명지 끝에는 본인의 관직, 이름, 본관과 사주단자에 적었던 내용을 다시 쓰고, 그 위를 종이로 덮어서 봉하는 피봉(被封) 절차를 거쳤습니다. 이렇게 누구의 시험지인지 알아볼 수 없게 이름을 가리는 것을 거명(去名)법이라고 했습니다. 시험을 채점할 때 시험관이 응시자의 신원을 모르게 하여 부정을 막기 위한 장치였습니다. 저도 대학교 때 과제 제출 시 학번만 적고 이름은 빼라는 교수님 지침을 받은 적이 있는데, 몇 백 년 전에도 똑같은 고민을 했다는 게 신기했습니다.

시험 당일, 응시생들은 새벽에 궁궐 입구에 모였습니다. 수험관이 농명 책을 보고 호명을 하면 한 사람씩 입장했고, 문 밖 좌우에서 옷과 소지품을 검사했습니다. 책을 몰래 가지고 들어가다 걸리면 바로 체포되었습니다. 시험장 안에서는 응시생마다 6자(약 1.8~2m) 간격으로 자리를 배치했습니다. 요즘 코로나 시기에 거리 두기 2m 이상 했던 것과 비슷합니다. 문과 전시(殿試)는 복시를 통과한 33명만 보는 시험이었기 때문에 궁궐 마당에 응시생이 빽빽이 앉아 있는 장면은 실제로는 없었습니다. 지금 과거 재현 행사에서 보는 것처럼 수백 명이 모여 시험 보는 건 별시(別試) 중 하나인 정시(庭試) 형태였습니다.

부정행위: 시험지 바꿔치기부터 대리 시험까지

조선시대 과거시험에는 엄격한 부정 방지 장치가 있었지만, 그럼에도 부정행위는 끊이지 않았습니다. 숙종 18년, 성균관 유생 이영하가 왕에게 올린 상소에는 과거시험의 8가지 대표적인 부정행위가 적혀 있습니다. 사술(詞述) 즉 남의 글을 빌려 쓰는 일, 휴종협책(携從挾冊) 즉 책을 몰래 가지고 시험장에 들어가는 일, 입문유린(入門蹂躪) 즉 혼란한 틈을 타서 시험장에 아무나 들어가는 일, 정본문아(呈本文衙) 즉 시험지를 바꿔 내는 일, 대장서입(代粧書入) 즉 밖에서 써온 답안지를 제출하는 일, 혁재누설(革才漏泄) 즉 시험문제를 미리 노출하는 일, 이질출입(易質出入) 즉 응시생들이 얼굴을 감추고 바꿔 다니는 일, 작축환봉(作軸換封) 즉 시험지를 논과하는 일 등입니다(출처: 한국고전번역원).

저도 중학교 때 시험 시간에 옆자리 친구 답안지를 슬쩍 넘겨본 적이 있었고, 대학교 때 과제 일부를 인터넷에서 긁어서 낸 적도 있었습니다. 그때 심장이 두근거렸던 기억이 나는데, 조선시대 사람들도 똑같이 심장 두근거리면서 콧구멍에 종이를 쑤셔 넣거나 감독관을 매수했을 것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시험 앞에서 사람이 하는 짓은 놀랍도록 비슷합니다.

실제로 과거 재현 행사 때도 휴대폰을 이용해서 아들의 답안을 아버지가 써주는 경우, 참고 서적을 몰래 가지고 들어오는 경우 등 부정행위가 종종 발생했다고 합니다. 조선시대에는 이를 막기 위해 시험지를 수거한 후 작축(作軸)이라는 절차를 거쳤습니다. 작축이란 시험지를 제출한 순서대로 천자문 순서(天·地·玄·黃)로 번호를 매기는 것을 의미합니다. 작축된 시험지는 봉미관(封彌官)이 답안과 피봉된 이름 부분을 떼어내어 동그라미를 그려 넣어 표시했습니다. 이를 할거법(割去法)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대기 중인 서생들로 하여금 붉은 글씨로 답안지를 다시 베껴 쓰게 하여 채점하는 역서법(易書法)을 시행했습니다. 응시생의 글씨를 시험관이 못 알아보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채점은 3명의 시험관이 나누어 하는 분보(分譜) 방식으로 진행되었고, 초고(初考)·재고(再考)·합고(合考) 순으로 이어졌습니다. 합고 단계에서는 시험관들의 의견이 엇갈려 싸움이 일어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합니다. 저도 과거 재현 행사에서 채점할 때 시험관들끼리 의견이 달라서 언성이 높아진 경우를 목격했습니다. 채점이 끝나면 본초(本草)를 찾아내어 피봉과 답안을 확인하는 대조 작업인 대각(對閣)을 거쳐, 성적순으로 명단을 작성하여 등수를 매겼습니다. 이 과정이 길게는 열흘 이상 걸린 적도 있었고, 대부분은 2~3일 정도 소요되었습니다.

급제 후: 방방의부터 3일간의 유가까지

힘든 과정을 거쳐 합격하면 드디어 급제자가 되어 궁궐 마당에서 국왕 앞에서 합격증을 받는 방방의(放榜儀) 절차를 거쳤습니다. 방방의는 문과와 무과를 함께 거행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여기서는 문과 방방의만 설명하겠습니다. 왕이 어좌에 오르고 종친과 문무백관이 4배를 올린 후, 방방관(放榜官)이 동쪽 계단으로 올라가 승지가 전달한 방(榜)을 받아 집사관에게 전달했습니다. 집사관 두 사람이 무릎을 꿇고 마주 앉아 방을 펼치면, 방방관이 제일 먼저 장원급제자의 명단을 외쳤습니다. 호명된 급제자는 동쪽 문으로 입장하여 자리로 나아갔고, 이후 차례로 명단을 외치면 급제자들이 입장했습니다.

급제자들이 국궁 4배를 올린 후, 이조정랑이 홍패(紅牌)를 나누어 주었습니다. 홍패란 과거 합격 증서로, 옥새가 찍힌 붉은색 문서를 의미합니다. 홍패에는 급제자의 이름, 과거에서 합격한 등수(갑과·을과·병과), '급제' 또는 '출신'이라는 표기, 과거가 치러진 연도가 적혀 있었습니다. 갑과 3명에게는 꽃과 술이 내려졌고, 급제자는 부복한 후 꿇어앉아 술을 마셨습니다. 갑과에게만 개(蓋)라는 양산 모양의 의장물이 하사되었습니다. 대치사관이 왕 앞에 나아가 무릎을 꿇고 축하의 글인 전문(箋文)을 읽으면, 종친과 문무백관이 4배를 올리고 왕이 어좌에서 내려와 돌아가면서 의식이 끝났습니다.

방방의 이후에는 국가에서 급제자들에게 잔치를 베푸는 은영연(恩榮宴)이 열렸습니다. 급제자들은 갑과·을과·병과 순으로 앉았고, 영의정·판서들과 시험관들이 당상에 앉아 술을 올리는 가운데 기생이 술을 권하고 광대들이 재주를 선보였다고 합니다. 급제자에게는 3일에서 5일 정도의 유가가 허락되었는데, 이를 삼일유가(三日遊街)라고 했습니다. 삼일유가란 과거에 급제한 사람이 3일 동안 시험관, 선배 급제자, 친척 등을 찾아다니며 인사를 올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때 왕이 내려준 어사화(御賜花)를 꽂은 사모를 쓰고 흉배를 단 관복을 입은 급제자는 풍악을 울리고 홍패를 앞세우고 말을 타고 행진했습니다.

저도 취업 합격 연락 받고 나서 부모님께 전화 드리고, 친척들에게 연락 돌리고, 은사 선생님 찾아뵙고 했던 기억이 납니다. 수백 년이 지났는데 합격 소식을 주변에 알리고 인사 드리는 그 마음은 똑같구나 싶었습니다. 문과 급제자 중 장원은 종6품, 나머지 갑과는 정7품, 을과 7명은 정8품, 병과 23명은 정9품 계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이는 원칙이었고, 실제로는 합격자 수가 관직보다 많아서 권지(權知)라는 임시 보직에서 대기하는 시간을 가지기도 했습니다. 조선 후기로 가면서 별시가 남발되어 연간 문과 급제자가 40~50명을 넘어서면서, 한정된 관직에 나아갈 수 없는 사람들이 많이 생겼고 수십 년을 홍패만 안고 늙어 죽는 사람이 부지기수였다고 합니다.

조선시대 과거시험을 깊이 파고들수록 드는 생각이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 겪고 있는 시험 스트레스, 정보 불평등, 수도권 집중, 합격 후에도 이어지는 경쟁, 이것들이 갑자기 생긴 게 아니라 몇 백 년 쌓인 구조 위에 있다는 겁니다. 형태만 바뀌었지 본질은 놀랍도록 닮아 있습니다. 저는 이번에 과거시험 자료를 읽으면서, 제가 겪는 것들이 단순히 제 세대의 불운이 아니라는 생각도 들었고, 동시에 그렇게 오래된 문제라는 게 쉽게 나아지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어서 복잡한 기분으로 자료를 덮었습니다. 그래도 한 가지 분명한 건, 조선시대 사람들도 좌절했지만 끊임없이 도전했다는 사실입니다. 지금 공시를 준비하는 분들에게, 이 글이 작은 위로가 되었으면 합니다.


참고: https://www.youtube.com/watch?v=u3X3sd3Q8UM&list=PLjynBlr3gjjJYrrAVBy0PPGWuTe4W6Ci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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