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능 당일 아침, 엄마가 새벽부터 일어나 미역국 빼고 밥을 차려주셨습니다. 저는 수험표를 세 번이나 확인하며 학교로 향했죠. 시험장 앞에는 부모님들이 손을 흔들어주고, 선생님들이 응원해주고, 처음 보는 아주머니들이 엿과 찹쌀떡을 나눠주던 그 풍경이 아직도 선명합니다. 그때는 그냥 연례행사처럼 당연하게 받아들였는데, 조선시대 과거시험 자료를 읽고 나서 그 장면이 새삼 다르게 보였습니다.
목숨 걸고 떠나는 조선시대 과거시험 30일의 여정
조선시대 경상도 선비가 과거를 보러 한양까지 가는 데 걸리는 시간은 무려 30일이었습니다. 저는 시험장까지 버스로 20분 걸렸는데, 그 사람들은 한 달을 걸어야 했던 겁니다. 산적을 만날까 봐 호위무사를 고용하고, 호랑이가 나올까 봐 부적을 챙기고, 늦게 출발하면 산에서 노숙해야 하니까 해 뜨기 전에 길을 나섰다고 합니다.
조선시대에는 한양을 중심으로 전국을 연결하는 9개의 큰 길이 있었습니다(출처: 문화재청). 이 길을 따라 지방 선비들은 과거 시험을 보러 한양으로 향했죠. 여기서 '9대로(九大路)'란 영남대로, 삼남대로, 의주대로 등 조선시대 주요 간선도로를 의미합니다. 경상도 출신 선비라면 안동에서 출발해 영남대로를 따라 상주, 문경새재, 충주를 거쳐 한양에 도착했고, 전라도 선비들은 호남대로를 따라 전주, 공주, 천안을 거쳐 한양으로 향했습니다.
이동 수단은 주로 도보였습니다. 부유한 양반 집안 출신이라면 말을 타고 갈 수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선비들은 걸어서 이동했죠. 저는 수능 당일 늦잠 잘까 봐 알람을 세 개 맞춰놨는데, 그 사람들은 목숨 걸고 길을 나섰던 겁니다. 현재 위치에서 다음 주막이나 원(院)까지 가는 데 걸어서 얼마나 걸리는지 계산이 되었기 때문에, 오전 9시에는 출발해야 해가 떨어지기 전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자칫 늦게 출발하면 꼼짝없이 산에서 노숙을 해야 하는 경우도 있었죠.
먹고 자는 문제는 어땠을까요? 조선 전기에는 원이라는 국가에서 관리하던 일종의 숙박 시설이 있었습니다. 지금도 인덕원, 보제원, 홍제원처럼 지명으로 남아 있는 이 원은 전국 1,300여 곳에 있었고, 관리뿐만 아니라 과거를 보러 가는 선비들도 이용할 수 있었습니다. 조선 후기로 오면 숙종 시대부터 시작해 영조 시기에 주막이 활성화되었고, 특히 과거 시험 시즌에는 한양으로 가는 길목에 임시 주막이 생겨나 수험생들을 받기도 했죠.
200대 1의 경쟁률, 33명만 뽑는 시험
저는 수능 경쟁률이 높다고 생각했는데, 대과(大科) 최종 합격자가 전국에서 33명이었다는 걸 읽으면서 비교 자체가 민망해졌습니다. 경쟁률이 200대 1을 넘기도 했다고 하는데, 정조실록에 따르면 이틀 동안 시험에 참여한 총 응시자 수는 무려 21만 명을 넘어섰다고 합니다(출처: 국사편찬위원회). 요즘 수능 수험생이 50만 명 정도인데, 그 사람들이 전부 걸어서 서울로 모인다고 상상해 보면 어마어마한 광경이었을 겁니다.
과거 시험은 3단계로 진행되었습니다. 1차 시험인 초시(初試), 초시 합격자 중에서 선발하는 2차 시험인 복시(覆試), 그리고 이들의 등급을 정하는 3차 시험인 전시(殿試)가 바로 그것입니다. 여기서 '과거 3층법'이란 이렇게 세 단계에 걸쳐 시험을 치르는 제도를 말합니다. 초시는 전국 팔도에서 치러졌지만, 복시는 한양에서 치러졌기 때문에 지방 선비들은 무조건 한양까지 가야 했습니다.
과거 시험은 5살 때부터 준비했는데, 외워야 하는 한자의 개수가 너무 많고 시험이 어려워서 30대 중반은 되어야 합격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즉, 평균적으로 30년을 공부해야 시험에 합격할 수 있었던 겁니다. 저는 수능 한 번 망쳤을 때 재수할까 말까 고민하면서 몇 달을 힘들어했는데, 그 사람들은 30년을 걸었습니다. 과거 급제자들의 평균 연령은 조선 전기에는 29세였지만 후기에 가서는 36세까지 올라갔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심지어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과거 공부를 하거나, 할아버지까지 함께 3대가 공부하는 풍경도 있었다고 하죠.
4대가 연속으로 과거 시험에 합격하지 못했을 경우, 그 가문은 양반 자격을 빼앗기게 됩니다. 본인의 미래뿐만 아니라 가문의 명예까지도 걸려 있는 중요한 시험이었던 겁니다. 저는 수능 끝나고 성적표 받아 들고 부모님 얼굴 보기 민망했던 기억이 있는데, 그건 그냥 눈치가 보이는 수준이었습니다. 그 시대 수험생들이 짊어지고 있던 무게와는 비교가 되지 않았습니다.
콧구멍 속 커닝 페이퍼와 부정행위
커닝 얘기에서는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나왔습니다. 종이를 작게 접어 콧구멍에 숨기고, 속옷에 써서 들어오고, 감독관을 매수하고. 저도 중학교 때 시험 시간에 옆자리 친구 답안지를 슬쩍 본 적이 있었는데, 그때 심장이 얼마나 쿵쾅거렸는지 기억납니다. 조선시대에도 그 쿵쾅거리는 심장을 안고 콧구멍에 종이를 쑤셔 넣었던 사람들이 있었다는 게, 예나 지금이나 사람 사는 건 정말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당시 부정행위 수법은 다양했습니다. 옆사람의 답안지를 베끼거나 의견을 나누어 답을 작성하는 경우도 있었고, 시험장에 다른 사람이 대신 들어오거나 이름을 바꾸어 제출하기도 했습니다. 암호를 정해 답을 말해 주는 방법이나, 밖에 있는 사람에게 답안지를 전달받는 방법을 사용하기도 했죠. 이런 부정행위는 기본적으로 감독관을 매수하고 사용했기 때문에 들켜도 그냥 넘어가기도 했으며, 대놓고 한 경우도 있었다고 합니다.
중국에서 과거 시험이 치러질 때도 부정행위가 판을 쳤는데, 이것을 방지하기 위해 독방에서 시험을 치르는 방식으로 바꿨더니 속옷을 커닝 페이퍼로 활용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합니다. 지금은 기술이 많이 발전해 전자 기기를 이용하는 부정행위가 많이 있긴 하지만, 기본적인 뼈대는 과거나 지금이나 비슷한 것 같습니다.
근데 그 부정행위가 웃기기만 한 건 아닙니다. 5살부터 공부 시작해서 평균 30년을 준비해야 합격할 수 있는 시험이었으니까요. 30년이면 지금 제 나이를 훌쩍 넘는 시간입니다. 가족 중 한 명이 농사 대신 공부를 하면 집안이 흔들리고, 시험에 떨어지면 그 긴 시간이 전부 날아가는 구조였습니다. 그 절박함이 커닝으로 이어진 거라고 생각하면 가볍게 웃을 수가 없었습니다.
과거 시험을 공부하면서 든 생각은, 우리가 수능을 힘들다고 하는 건 맞는 말이지만 그것이 얼마나 나아진 조건 위에 있는지는 잘 모르고 있다는 거였습니다. 시험장까지 걸어서 30일 갈 필요 없고, 산적 피할 필요 없고, 감독관 매수 안 해도 되고, 무엇보다 떨어져도 신분이 박탈되지 않습니다. 그 당연한 조건들이 당연하지 않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조선시대에 태어나지 않은 것이 감사하다는 말이, 이번 자료를 읽고 나서는 가벼운 농담처럼 들리지 않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