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솔직히 저는 학창시절에 학원을 빠지고 친구들이랑 PC방이나 노래방을 가서 시간을 때운 적이 한 번 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부모님께는 수업 잘 들었다고 거짓말하고요. 그런데 이화학당의 첫 학생들에 대한 자료를 읽으면서 제 과거가 갑자기 부끄러워졌습니다. 일반적으로 교육 기회는 누구에게나 평등하게 주어진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많은데, 제 경험상 그 기회가 얼마나 귀한 것인지 실감하지 못하고 살아온 것 같습니다. 배움이 목숨을 건 선택이었던 시대의 이야기를 통해, 지금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교육권이 얼마나 힘겹게 만들어진 것인지 되돌아보게 되었습니다.
살아남기 위해 선택한 배움
이화학당의 첫 학생은 영어를 배워 왕비의 통역관이 되고 싶었던 여인이었습니다. 두 번째 학생은 집이 너무 가난해서 굶어 죽는 것보다는 낫겠다는 판단에 어머니가 데려다 맡긴 아이였습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이 아이가 배우고 싶어서 온 게 아니라 생존을 위해 온 케이스였다는 겁니다.
1885년 설립된 이화학당은 한국 최초의 여성 근대교육기관이었습니다(출처: 이화여자대학교). 여기서 근대교육기관(Modern Educational Institution)이란 전통적인 유교 교육이 아닌 서양식 교육 체계를 도입한 학교를 의미합니다. 당시 조선 사회에서 여성이 글을 배운다는 것 자체가 집안의 수치로 여겨지던 시대였으니, 이 학교의 존재 자체가 엄청난 도전이었던 셈입니다.
저는 그냥 태어나니까 학교에 다니고 있었습니다. 아무도 막지 않았고, 오히려 부모님이 학원비까지 내주면서 보내줬는데도 저는 그걸 귀찮아했습니다. 제 경험상 공부는 그냥 피하고 싶은 숙제 같은 거였거든요. 그런데 이화학당 시절에 태어났다면 저 같은 경우는 공부할 기회 자체를 얻지 못하고 집에서 살림만 배우다 끝났을 겁니다. 막상 기회가 주어지니까 그게 얼마나 소중한 건지 몰랐던 거죠.
나중에는 이화학당에 다니는 딸 때문에 가문이 망한다며 가족회의를 연 집안도 있었고, 체조하다가 발을 높이 든다는 이유로 학교에서 딸을 업어 데려가는 부모도 있었습니다. 배움의 기회를 얻는 것 자체가 싸움이었던 시절입니다.
유관순, 16살 소녀가 보여준 신념
유관순 열사의 이야기는 제게 더 큰 충격으로 다가왔습니다. 16살에 담을 넘어 시위대에 합류하고, 고문을 당하면서도 동료들의 이름을 끝까지 말하지 않았던 소녀. 일반적으로 독립운동가 하면 나이 든 어른들을 떠올리기 쉬운데, 실제로는 10대 학생이 그런 선택을 했다는 게 믿기지 않았습니다.
저도 중학교 1학년 때 선생님한테 친구가 먼저 시작했다고 바로 불어버린 기억이 있습니다. 별로 대단한 일도 아니었는데 그냥 혼나기 싫어서 그랬습니다. 그 기억이 유관순 이야기 읽다가 갑자기 떠올랐습니다. 비교 자체가 민망한 수준이지만, 그래서 더 오래 생각하게 됐습니다.
유관순은 1919년 3.1운동 당시 이화학당 학생이었습니다. 그녀는 고향인 천안 아우내 장터에서 독립 만세운동을 주도했고, 일본 헌병대에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습니다(출처: 독립기념관). 여기서 만세운동이란 일제의 식민 지배에 저항하며 독립을 요구하는 비폭력 시위를 의미합니다. 쉽게 말해 무기 없이 목소리만으로 맞선 저항이었던 거죠.
실제로 저는 뭔가 불편한 상황이 생기면 회피하는 편입니다. 직장에서도 부당한 일이 있어도 '내가 참으면 되지' 하고 넘어갈 때가 많았습니다. 그런데 유관순은 16살의 나이에 자기 목숨을 걸고 옳다고 믿는 일을 했습니다. 이 차이가 저를 한참 동안 생각하게 만들었습니다.
스크랜튼, 52세에 시작한 새로운 도전의 이화학당
스크랜튼 부인이 52세에 조선에 왔다는 것도 제 기준으로는 잘 상상이 안 되는 이야기입니다. 저는 뭔가 새로운 걸 시작하려고 하면 "나이가 찼네, 지금 시작해서 뭘 하겠어" 같은 말을 스스로에게 하는 편입니다. 서른 중반에 새 분야 공부를 시작할까 고민하다가 포기한 적도 있었고요.
그런데 스크랜튼 부인은 52세에 언어도 모르는 나라로 건너와서, 아무도 학교에 오지 않는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처음에는 학생이 한 명이었고, 그 한 명도 석 달 만에 떠났습니다. 교육 지속성(Educational Continuity)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최악의 시작이었던 셈입니다. 여기서 교육 지속성이란 학생들이 중도에 그만두지 않고 꾸준히 학업을 이어가는 비율을 뜻합니다. 나라면 그 시점에서 "역시 안 되는구나" 하고 접었을 것 같습니다.
더 놀라운 건 스크랜튼 부인이 자신이 가르친 아이들을 미국에 노예로 보낸다는 괴담에 시달리면서도 서약서까지 써주며 학생을 지켰다는 점입니다. 제 경험상 소문이나 오해에 시달리면 그냥 상황을 정리하고 싶어지거든요. 실제로 제가 이전 직장에서 억울한 소문 때문에 힘들었을 때, 해명하다가 지쳐서 그냥 사직서를 낸 적이 있습니다.
당시 조선 사회에서는 미국 선교사들이 조선인을 납치해 간다는 유언비어가 퍼져 있었습니다. 스크랜튼 부인은 이런 편견을 깨기 위해 학부모들과 직접 만나 설명하고, 필요하면 서약서를 작성해주기까지 했습니다. 이런 지독한 교육혼(Teaching Spirit) 덕분에 이화학당은 점차 학생 수를 늘려갈 수 있었습니다. 여기서 교육혼이란 어떤 어려움에도 학생을 가르치겠다는 강한 의지와 사명감을 의미합니다.
이화학당은 1887년에 정식 학교 건물을 갖추게 되었고, 1910년대에는 수백 명의 학생이 다니는 학교로 성장했습니다. 이 모든 것이 한 사람의 포기하지 않는 마음에서 시작된 겁니다. 일반적으로 성공한 교육 기관은 처음부터 좋은 조건에서 시작했을 거라고 생각하기 쉬운데, 실제로는 이렇게 악조건 속에서도 끝까지 버틴 사람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거죠.
이화학당 편을 쓰면서 결국 하고 싶은 말은 하나입니다. 배움의 기회가 얼마나 힘겹게 만들어진 것인지를, 지금 우리는 너무 당연하게 여기고 있다는 겁니다. 저 포함해서요. 제가 학원을 빠지고 PC방에 가던 그 시간이, 누군가는 목숨을 걸고 지키려 했던 권리였다는 걸 이제야 제대로 깨달았습니다. 앞으로는 공부가 단순히 제 앞가림을 위한 도구가 아니라 세상을 더 밝게 만드는 힘이 될 수 있도록, 좀 더 진지하게 대해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