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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훈의 교육 헌신 (오산학교, 민족 대표, 유언)

by qnwkdjaak 2026. 3. 8.

이승훈의 교육 헌신 (오산학교, 민족 대표, 유언)

 

1864년 평안북도 정주에서 태어난 이승훈은 오늘날 가치로 약 700억 원에 달하는 재산을 모은 조선 최대의 거부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그 모든 부를 던져 오산학교를 세웠고, 죽어서는 자신의 유골을 교육 표본으로 쓰라는 유언을 남겼습니다. 저는 이 이야기를 처음 접했을 때 솔직히 믿기지 않았습니다. 돈이 있으면 편하게 살고 싶은 게 인간의 본성 아닌가요. 하지만 참고 자료를 읽으면 읽을수록, 이승훈 선생의 삶은 제가 상상했던 위인전 속 미담이 아니라 뼈를 깎는 실천의 연속이었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나라 없는 양반이 무슨 소용인가라는 각성 이후, 그는 자신의 모든 것을 조선의 미래를 위해 바쳤습니다.

 이승훈의 오산학교 설립과 교육 철학

이승훈이 오산학교를 세운 것은 1907년, 그의 나이 43세 때였습니다. 당시 조선은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을 빼앗긴 상태였고, 국권 회복을 위한 방법론을 놓고 여러 의견이 대립하던 시기였습니다. 이때 이승훈은 평양에서 도산 안창호의 연설을 듣고 깊은 감명을 받았다고 합니다. "나라가 없는데 내 집이 있으면 뭐 하나. 혼을 빼앗겼는데 이 몸이 호의호식하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이 말을 듣는 순간, 이승훈은 자신이 쌓아온 부와 명예가 허상임을 깨달았습니다(출처: 독립기념관).

저는 이 대목을 읽으면서 제 학창 시절이 부끄러워졌습니다. 누군가는 나라를 되찾기 위해 목숨 걸고 공부했는데, 저는 학원 가기 싫어서 버스 정류장을 어슬렁거린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거든요. 이승훈은 전 재산을 털어 평안북도 정주에 오산학교를 세웠고, 개교 당시 학생은 고작 7명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이 7명을 미래의 독립 지도자로 믿었고, 학생들에게 존댓말을 썼습니다. "이 학생들 가운데 나라를 구할 사람이 나올 수 있다"는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오산학교의 교육 방침은 당시로서는 혁신적이었습니다. 학생회 운영, 임원 선출, 기숙사 규정까지 모두 학생 자율에 맡겼고, 시험조차 무감독으로 치렀습니다. 여기서 '자율 교육'이란 학생 스스로 판단하고 책임지는 능력을 키우는 교육 방식을 의미합니다. 이승훈은 단순히 지식을 주입하는 교육이 아니라, 독립된 인격체로서 스스로 사고하고 행동하는 인재를 키우고자 했습니다. 저는 이 부분에서 현재 우리 교육이 얼마나 입시 위주로 변질되었는지 다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오산학교에서는 수신, 역사, 지리, 영어, 산술, 대수, 헌법 대의, 물리, 천문학, 생물, 광물, 창가, 체조 등 다양한 근대 과목을 가르쳤습니다. 이는 당시 조선의 전통 서당 교육과는 완전히 다른 커리큘럼이었습니다. 이승훈은 교육이 단순히 과거 급제를 위한 도구가 아니라, 민족의 미래를 준비하는 과정이어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실제로 오산학교는 함석헌, 조만식, 김억 등 수많은 독립운동가와 지식인을 배출했습니다(출처: 국가보훈처).

3·1운동 민족 대표로서의 역할

1919년, 이승훈은 민족 대표 33인 중 한 명으로 3·1 독립선언에 서명했습니다. 당시 그의 나이는 55세였습니다. 3·1운동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종교계 인사들 사이에 의견이 갈렸습니다. 기독교와 천도교, 불교가 손을 잡아야 한다는 데는 동의했지만, 누가 먼저 선언문에 서명할 것인가를 놓고 신경전이 벌어졌습니다. 이때 이승훈이 나서서 한마디 했습니다. "순서가 무슨 순서야? 이거 죽는 순서야. 누굴 먼저 쓰면 어때? 의암(손병희)의 이름부터 먼저 쓰게."

저는 이 장면을 읽으면서 진짜 리더십이 뭔지 느꼈습니다. 남들이 체면과 순서를 따질 때, 이승훈은 본질을 꿰뚫었습니다. 독립선언은 목숨을 거는 일이지, 명예를 다투는 자리가 아니라는 것을 그는 알았습니다. 그의 호통 이후 논쟁은 일순간에 정리되었고, 민족 대표 33인은 1919년 3월 1일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했습니다.

이후 이승훈은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습니다. 재판 과정에서 그는 당당하게 말했습니다. "자유를 빼앗긴 지 10년 동안 고난과 굴욕이 우리를 죽음의 골짜기로 이끌었다. 우리는 최후의 일인, 최후의 일각까지 적의 칼 아래 쓰러질지언정 부자유, 불평등 속에서 남에게 이끌리는 짐승이 되기를 원치 않는다." 이 발언은 단순한 변론이 아니라, 민족의 자존심을 지키는 선언이었습니다.

여기서 '민족 대표'란 3·1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33명의 종교·사회 지도자를 의미합니다. 이들은 각계를 대표해 조선 독립의 당위성을 전 세계에 알리고자 했습니다. 이승훈은 그중에서도 기독교 대표로서, 평안도 지역 신민회 활동 경력과 오산학교 설립자라는 상징성을 동시에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는 3년형을 선고받고 1922년에 출옥했는데, 민족 대표 33인 중 가장 마지막으로 석방된 인물이었습니다.

옥중에서도 이승훈은 성경을 100회 이상 읽으며 신앙을 다졌고, 다른 수감자들을 위해 변소 청소를 자청했다고 합니다. 저는 이 대목에서 정말 놀랐습니다. 조선 최대의 거부였던 사람이, 그것도 민족 대표로서 존경받던 인물이, 감옥에서 가장 더러운 일을 스스로 맡았다니요. 이승훈에게 교육은 말이 아니라 실천이었고, 그 실천은 죽는 순간까지 이어졌습니다.

마지막 유언과 교육에 대한 헌신

1930년 5월 3일, 오산학교에서는 이승훈의 동상 제막식이 열렸습니다. 제자들이 스승의 공을 기리기 위해 세운 동상이었습니다. 이날 이승훈은 수천 명의 참석자 앞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배우지 못하고 아는 게 없어. 신의 말만 따랐을 뿐이요. 앞으로도 그럴 거라 믿습니다." 그러나 이 소망은 이루어지지 못했습니다. 제막식으로부터 닷새 후인 5월 8일, 이승훈은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가 남긴 유언은 충격적이었습니다. "내 유해는 땅에 묻지 말고 표본으로 만들어 학생들의 교육에 쓰게 하라." 당시는 유교 윤리가 지배적이던 시대였고, 시신을 훼손하는 것은 불효 중의 불효로 여겨졌습니다. 하지만 이승훈은 자신의 육신마저 교육 재료로 바치겠다는 뜻을 밝혔습니다. 유가족은 그의 유언에 따라 시신을 경성제국대학에 기증했고, 대학은 유골을 의학 표본으로 제작하기 시작했습니다.

여기서 '표본'이란 생물학이나 의학 교육에서 인체 구조를 학습하기 위해 실제 뼈나 장기를 보존·전시한 교육 자료를 의미합니다. 쉽게 말해, 학생들이 교과서가 아닌 실물로 인체를 배울 수 있도록 만든 학습 도구입니다. 이승훈은 자신이 죽어서도 학생들에게 도움이 되기를 원했습니다. 하지만 조선총독부는 이 계획을 중단시켰습니다. 이승훈의 죽음이 독립운동의 상징이 될까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결국 6개월 뒤, 유골은 오산학교로 돌아왔고, 학교 뒷산에 안장되었습니다.

저는 이 유언을 읽으면서 솔직히 소름이 돋았습니다. 자신의 몸까지 교육에 바치겠다는 사람을, 저는 이승훈 말고는 본 적이 없습니다. 요즘 표현으로 "진짜 레전드"라는 말이 어울립니다. 하지만 동시에, 그만큼 이승훈은 교육이 나라를 구하는 유일한 길이라 믿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에게 교육은 단순히 지식을 전달하는 행위가 아니라, 민족의 혼을 지키고 미래를 준비하는 성스러운 투쟁이었습니다.

이승훈의 삶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가난한 평민 출신으로 태어나 700억 원대 재산을 모았지만, 전 재산을 교육에 바침
  • 오산학교를 설립해 함석헌, 조만식 등 수많은 독립운동가 배출
  • 3·1운동 민족 대표 33인 중 한 명으로 독립선언서에 서명
  • 마지막 유언으로 자신의 유골을 교육 표본으로 기증

이승훈의 교육 철학은 오늘날 우리 교육에 많은 질문을 던집니다. 그는 학생들에게 존댓말을 썼고, 시험을 무감독으로 치르게 했으며, 자율과 책임을 강조했습니다. 반면 현재 우리 교육은 어떤가요? 입시 경쟁이 과열되면서 학생들은 점수를 위한 도구로 전락했고, 교육은 "얼마나 좋은 대학에 가느냐"로만 평가됩니다. 저 역시 학창 시절 시험 때 옆 친구 답안지를 훔쳐본 적이 있습니다. 별생각 없이 한 일이었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그게 얼마나 부끄러운 행동인지 깨닫습니다.

일부에서는 이승훈의 교육 방식이 이상적이긴 하지만 현실적으로 적용하기 어렵다고 말합니다. 경쟁이 치열한 사회에서 자율만 강조하면 학생들이 뒤처질 수 있다는 우려입니다. 실제로 오산학교도 일제의 탄압을 받으며 여러 차례 위기를 겪었고, 6·25 전쟁 이후에는 서울로 이전해 재건되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개인적으로, 경쟁 논리만으로 교육을 재단하는 것이야말로 위험하다고 봅니다. 이승훈이 강조한 것은 단순히 성적이 아니라, 스스로 생각하고 책임지는 인간을 키우는 것이었습니다.

현재 교육 정책을 보면, 어른들이 초등학생도 못 푸는 문제를 내놓고 "우리 애는 다 풀었다"며 자랑하는 모습을 종종 봅니다. 이런 풍토 속에서 교육의 본질은 점점 흐려지고 있습니다. 이승훈이 오산학교를 세울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민족의 미래였습니다. 그는 학생 한 명 한 명을 독립된 인격체로 존중했고, 그들이 조국의 기둥이 될 것이라 믿었습니다. 지금 우리 교육은 학생을 어떻게 보고 있나요? 점수를 올려야 할 대상인가요, 아니면 미래를 준비하는 주체인가요?

저는 이승훈의 삶을 따라가며 교육이란 무엇인가를 다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부를 누리며 편안하게 살 수 있었지만, 그 대신 나라를 택했습니다. 학생들을 가르치면서도 자신을 낮추고, 죽어서도 교육에 헌신하겠다는 유언을 남겼습니다. 이런 삶을 본받기는 어렵지만, 적어도 교육의 방향이 어디를 향해야 하는지는 분명히 보여줍니다. 입시를 위한 공부가 아니라, 나를 일깨우고 사회에 기여하는 배움. 그것이 이승훈이 꿈꾼 교육이었고, 지금도 우리가 추구해야 할 교육입니다.

이승훈 선생의 삶은 한 사람이 얼마나 큰 변화를 만들 수 있는지 보여줍니다. 그는 700억 원대 재산을 가진 거부였지만, 그 돈을 자신을 위해 쓰지 않았습니다. 대신 오산학교를 세우고, 3·1운동에 참여하고, 마지막 순간까지 교육에 헌신했습니다. 저는 그의 유언을 읽으며 부끄러웠습니다. 저는 제가 힘들게 모은 돈조차 남을 위해 쓰는 것이 아직도 어렵습니다. 하지만 이승훈은 자신의 육신까지 기꺼이 바쳤습니다. 이것이 진정한 교육자의 모습이고, 우리가 기억해야 할 정신입니다. 현재 입시 지옥으로 변질된 교육 풍토 속에서, 이승훈의 정신은 우리에게 중요한 질문을 던집니다. 교육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점수를 위한 도구인가, 미래를 준비하는 과정인가? 이 질문에 답하는 것이 우리 세대의 과제입니다.


참고: https://www.youtube.com/watch?v=gioGq3lcQIc&t=14s
https://www.i815.or.kr (독립기념관)
https://www.mpva.go.kr (국가보훈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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