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솔직히 저는 연세대학교라는 이름을 들으면 가장 먼저 고연전이 떠올랐습니다. 매년 가을 응원가 부르고 응원복 입고 난리가 나는 그 장면들. 저한테 연세대는 그냥 SKY 중 하나, 신촌에 있는 명문대 정도였습니다. 그 학교가 어떻게 시작됐는지는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습니다. 이번에 자료를 찾아보면서 연세대의 시작이 스물일곱 살짜리 선교사 한 명에서 비롯됐다는 것을, 그리고 일제강점기 내내 민족교육의 보루였다는 사실을 처음 제대로 알게 되었습니다.
연세대학교 역사 언더우드와 연희전문학교, 교육으로 조선을 바꾸다
1885년 4월 5일, 인천 제물포항에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Horace Grant Underwood)라는 미국 북장로회 소속 선교사가 도착합니다. 당시 그의 나이 스물일곱. 저는 스물일곱에 취업 준비하면서 자소서 쓰다 지우고 면접 떨어지면 편의점 맥주 사서 유튜브 보던 나이였습니다. 그 나이에 언어도 모르는 나라로 건너와서 평생을 바칠 결심을 한 사람이 있었다는 게 읽으면서도 잘 실감이 안 됐습니다.
언더우드는 조선에 도착한 직후부터 교육 사업에 집중합니다. 1886년 배재학당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기 시작했고, 한글 성경 번역 작업에도 참여했습니다. 여기서 배재학당(培材學堂)이란 '인재를 양성한다'는 뜻으로, 한국 최초의 근대식 사립학교를 의미합니다. 당시 조선은 개항 직후 서구 열강의 틈바구니 속에서 미래를 예측할 수 없는 격변의 시기였고, 기독교 선교 활동은 엄격히 금지된 상황이었습니다.
언더우드는 서울 거리에 버려진 고아와 사생아를 모아 고아학당을 시작했습니다. 이 학당 출신 중에는 훗날 항일 독립운동가이자 파리 강화회의 한국 대표로 참석한 우사 김규식 선생과 도산 안창호 선생도 있었습니다. 교육을 통해 인재를 키워 조선의 미래를 열어야 한다는 언더우드의 의지가 실현된 것입니다.
1915년, 언더우드는 조선의 미래를 위한 고등교육 기관 설립에 나섭니다. 그렇게 탄생한 학교가 바로 연희전문학교입니다. 여기서 연희(延禧)란 '은혜를 널리 펼친다'는 뜻으로, 학교의 설립 정신을 담은 이름입니다. 언더우드는 학교 부지를 구하고 직접 벽돌을 나르며 캠퍼스를 건설했습니다(출처: 연세대학교 대학사료실). 하지만 개교 얼마 지나지 않아 건강이 악화되어 1916년 고국으로 돌아갔고, 더 이상 조선 땅을 밟지 못한 채 하나님 품으로 돌아갔습니다.
연희전문학교는 언더우드 사후에도 그의 정신을 이어받아 발전했습니다. 1917년 재단법인 인가를 받았고, 1920년에는 수물과(數物科)를 개설하여 천문학, 수학, 화학 등 서양 근대 과학을 본격적으로 가르치기 시작했습니다. 수물과란 수학과 물리학을 중심으로 한 자연과학 학과를 의미하며, 지금의 이과대학 또는 자연대학에 해당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일제강점기, 민족교육의 마지막 보루
연희전문학교가 역사적으로 중요한 이유는 일제강점기 당시 민족교육을 끝까지 지켜낸 학교였기 때문입니다. 당시 조선 최고의 고등교육기관은 경성제국대학(京城帝國大學)이었지만, 경성제대에는 이공계 학부가 없었습니다. 일제는 조선인들이 과학 기술을 배우면 위험하다고 판단해 의도적으로 이공계를 만들지 않았습니다. 1940년대 일본이 전쟁을 치르면서 기술자가 부족해지자 그제야 이공학부를 만들었을 정도입니다.
반면 연희전문학교는 1919년 수물과 1회 졸업생 4명을 배출했고, 그중 한 명이 바로 이원철(李源喆) 박사입니다. 이원철 박사는 연희전문 졸업 후 모교에서 강사로 학생들을 가르치다가, 연희전문의 선교사 교수들이 장학금을 마련해주어 미국 유학길에 오릅니다. 미국에서 편입한 대학을 올에이(All A)로 졸업하고, 약 3년 만에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그는 독수리자리 에타별의 맥동변광성(脈動變光星) 특성을 발견했는데, 여기서 맥동변광성이란 별이 팽창과 수축을 반복하면서 밝기가 주기적으로 변하는 별을 의미합니다. 이 발견은 당시 미국 천문학계에서도 주목받았고, 이원철은 대한민국 이학박사 1호가 되었습니다.
이원철 박사는 미국에서 더 나은 환경과 대우를 받을 수 있었지만, 다시 연희전문으로 돌아와 교수로 학생들을 가르쳤습니다. 그는 언더우드관 옥상에 한국 최초의 현대식 굴절망원경을 설치했습니다. 하지만 이 망원경은 나중에 일제가 전쟁 물자로 강제로 가져가버렸습니다. 저는 이 대목을 읽으면서 한동안 멍하게 있었습니다. 학문을 위한 도구마저 전쟁 물자로 빼앗아가던 시절이었다는 것이 실감 나지 않았습니다.
연희전문학교는 민족주의 학풍이 강했습니다. 일제의 무단통치가 실시되기 직전인 1932년과 1946년, 연희전문은 조선어 시험 문제를 출제했습니다. 이는 조선어학회 회원이자 연희전문 문과 교수였던 외솔 최현배 선생이 직접 출제한 것입니다. 1930년대는 일제의 강압 정치가 본격화되면서 경성제대 등 다른 대학에서는 일본어만을 국어 과목으로 채택했던 시기입니다. 연희전문은 이와 다른 행보를 걸었습니다.
학생들도 적극적으로 민족운동에 참여했습니다. 1919년 3.1운동, 1920년 조선학생대회, 1926년 6.10만세운동, 1929년 광주학생운동 등 일제 지배하에서 벌어진 주요 민족운동에 연희전문 학생들이 빠지지 않고 참여했습니다(출처: 국사편찬위원회). 이로 인해 연희전문은 일제로부터 가혹한 탄압을 받았습니다.
1938년부터는 일본어를 제1외국어로 가르치도록 강요당했고, 1944년 4월에는 적산(敵産)이라는 명목으로 조선총독부에 학교가 몰수당했습니다. 한국인 간부와 교수진이 강제 추방당했고, 교명마저 경성공업경영전문학교로 바뀌는 굴욕까지 당했습니다. 하지만 1년 뒤 일제가 패망하면서 연희전문학교는 교명을 되찾았고, 1957년 세브란스 의과대학과 통합하여 연세대학교가 되었습니다.
연세대학교에는 지금도 일어일문학과가 없습니다. 민족고대인 고려대학교에는 일어일문학과가 있지만, 연세대는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만들지 않습니다. 한일 관계가 정상화된 지 오래지만, 연세대는 이 사실에 자긍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저는 학과를 고를 때 취업률과 연봉만 따졌습니다. 학과 이름 하나에 학교의 역사와 저항의 기억이 담길 수 있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었습니다.
연희전문 출신 중 가장 잘 알려진 인물은 윤동주 시인입니다. 1941년 연희전문을 졸업하면서 그는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만들었습니다. 한글로 쓴 시집이 그 자체로 위험했던 시대였습니다. 후배 정병욱은 징집되어 전쟁터로 끌려가면서도 이 시집을 고향 집 마룻바닥에 숨겨 지켰고, 해방 후 시집 출간을 도왔습니다. 동기 강처중은 윤동주가 일본에서 보낸 마지막 시 10편과 유품을 소중히 보관했습니다. 저는 책을 빌려서 읽다가 반납 기한 넘기고 연체료 내는 게 귀찮아서 중간에 반납한 적도 있는데, 누군가는 목숨보다 더 소중하게 시집 한 권을 품에 안고 전쟁터에 갔습니다.
윤동주는 1945년 일본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독립운동 혐의로 옥사했습니다. 1968년 유족과 문인, 학생들이 참여한 가운데 연세대 캠퍼스에 최초의 윤동주 시비가 세워졌고, 2020년에는 핀슨관이 윤동주기념관으로 재탄생했습니다. 연세대학교는 매년 윤동주 시문학상과 추모제를 개최하며 그의 시 정신을 계승하고 있습니다.
연세대를 목표로 수능 공부를 했거나 지금 그 학교를 다니고 있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은 알아야 할 이야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수능 등급으로만 그 학교의 가치를 재고 있던 제 자신이, 이 자료를 다 읽고 나서는 조금 부끄러워졌습니다. 연세대학교는 단순히 명문대가 아니라, 언더우드의 헌신과 연희전문의 저항 정신 위에 세워진 학교였습니다. 그 역사를 알고 나니 캠퍼스에 덩쿨이 자란 오래된 건물들이 다르게 보였습니다.
참고: https://www.youtube.com/watch?v=-Ref2Q9tWo8
https://www.youtube.com/watch?v=vX6p4RC_x4k
https://www.youtube.com/watch?v=DnE7hwno-4Q
https://www.youtube.com/watch?v=so1vcepUFtQ
https://www.youtube.com/watch?v=G653LC-Dnr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