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연산군 하면 흔히 폭군, 흥청망청이라는 단어가 먼저 떠오릅니다. 저도 처음엔 그저 어머니의 죽음에 눈이 뒤집혀 신하들을 마구잡이로 죽인 왕 정도로만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자료를 들여다볼수록 한 가지 사실이 자꾸 마음에 걸렸습니다. 연산군은 사실 꽤 총명한 아이였고, 왕위에 오른 뒤에도 학문의 깊이가 문제된 적은 없었다는 점입니다. 적어도 출발점만 보면 그는 결코 무능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그를 역사 최악의 폭군으로 만들었을까요.
연산군의 비극 느슨한 교육과 성장 환경의 공백
일반적으로 조선 세자의 교육은 10살에 입학례(入學禮)를 거행하고 본격적인 군주 수업을 시작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여기서 입학례란 세자가 성균관에 정식으로 입학하는 의례로, 이후 경연(經筵)과 서연(書筵) 등을 통해 유교 경전과 정치 실무를 배우게 됩니다(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그런데 연산군의 아버지 성종은 아들의 입학례를 15살까지 미뤘고, 서연도 처음엔 3일에 한 번, 나중엔 5일에 한 번으로 줄여버렸습니다.
솔직히 이 부분에서 저는 큰 의문이 들었습니다. 성종은 본인이 왕위에 오른 뒤 하루에 네 번씩 경연에 참석할 만큼 공부에 철저했던 인물입니다. 그런데 정작 세자 교육은 왜 이렇게 느슨하게 진행했을까요. 게다가 한여름에도 본인은 경연을 쉬지 않으면서, 세자에게는 "날씨가 더우니 여름 동안은 서연을 아침에 한 번만 하라"고 명했다는 기록을 보면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더 큰 문제는 정서적 환경이었습니다. 연산군은 6살 때 친어머니 폐비 윤씨가 사약을 받고 죽었지만, 그 사실을 오랫동안 숨김 받으며 자랐습니다. 성종과 신하들은 끝까지 연산에게 폐비 윤씨의 존재를 감췄고, 연산은 계모인 정현왕후를 친어머니로 알고 컸습니다. 진실을 알게 된 것은 성종의 묘지문을 작성하던 중이었고, 그때 연산의 나이는 이미 20살이었습니다.
제 생각에 이 시기의 경험이 연산군의 세계관을 결정적으로 왜곡시킨 것 같습니다. 재능은 있었지만 올바른 교육을 받지 못했고, 정서적으로 불안정한 환경에서 자라며 권력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에 대한 감각을 키울 기회가 없었던 것이죠.
무오사화와 갑자사화, 권력의 정당성과 오용
연산군이 왕위에 오른 뒤 처음 몇 년간은 오히려 괜찮은 왕이었다는 평가도 있습니다. 하지만 연산 4년에 터진 무오사화(戊午士禍)를 기점으로 상황이 급변합니다. 무오사화란 김일손 등 사림파 학자들이 실록 사초(史草)에 세조의 왕위 찬탈을 비판하는 내용을 기록했다가 대거 숙청당한 사건입니다. 여기서 사초란 사관이 역사 기록을 위해 작성하는 1차 자료로, 왕도 함부로 볼 수 없는 비밀 문서입니다(출처: 국사편찬위원회).
일반적으로 무오사화는 연산군이 신하들을 제거하기 위해 일으킨 사건으로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훈구파와 사림파 간의 권력 다툼이 복잡하게 얽힌 사건이었습니다. 연산군은 이 사건을 통해 자신에게 반대하는 세력을 제거할 명분을 얻었고, 이후 왕권을 크게 강화했습니다.
그런데 진짜 문제는 6년 뒤인 연산 10년에 벌어진 갑자사화(甲子士禍)였습니다. 이 사건은 연산군이 친어머니 폐비 윤씨의 죽음에 관련된 자들을 대대적으로 숙청한 사건으로, 무려 200여 명이 죽거나 유배당했습니다. 연산군은 폐비 윤씨에게 사약을 전달한 이세좌를 비롯해 당시 찬성했던 대신들, 심지어 이미 죽은 정인지 등의 시신까지 꺼내 머리를 자르는 부관참시(剖棺斬屍)를 감행했습니다.
제가 보기에 갑자사화는 단순히 어머니의 복수를 위한 사건이 아니었습니다. 연산군은 이미 조정의 구조적 문제를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신하들의 힘이 너무 세졌고, 이들은 자기들끼리 인맥과 연줄을 통해 조정을 장악했으며, 안으로는 왕을 억압하고 밖으로는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해 백성들을 핍박했습니다. 연산군은 폐비 윤씨라는 최고의 명분을 활용해 이들을 제거하고 절대 왕권을 구축하려 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문제는 대안을 제시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사림파를 대거 제거하고 삼정승까지 전부 죽여놓고, 이들을 대신해 조정을 올바르게 이끌어갈 새로운 세력을 기르지 않았습니다. 또한 관료들 사이의 낡고 부패한 관습을 없애긴 했지만, 그 관습이 만들었던 장점들도 다 없애버렸으니 조정은 혼란에 빠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치와 향락, 그리고 반정의 명분
갑자사화 이후 연산군은 본격적으로 사치와 향락에 빠져들었습니다. 전국에서 기녀를 선발해 흥청, 운평, 광희 등으로 분류하고, 궁궐 주변에 금표(禁標)를 설치해 민간인의 출입을 금지했습니다. 심지어 성균관이 있던 자리에 동물원을 지어 사냥터로 쓰기까지 했습니다. 여기서 금표란 왕의 전용 구역을 표시하는 경계선으로, 연산군은 이를 계속 확장해 경기도 땅 절반을 금표 안에 넣어버렸습니다.
일반적으로 연산군의 사치가 백성들을 극도로 핍박했다고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그 정도까지는 아니었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서총대는 상식을 벗어날 정도로 큰 규모가 아니었고, 금표를 설치할 때 나름 보상도 해줬으며, 빼앗은 땅 중 대부분은 백성이 아닌 권세가의 땅이었다는 겁니다(출처: 임용한, 『조선 국왕 이야기』). 제 생각에도 연산군을 폐위시킨 세력들이 자신들의 행동을 정당화하기 위해 연산군의 악행을 과장한 측면이 분명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연산군이 잘했다는 건 절대 아닙니다. 연산군은 절대 권력을 백성을 위해 쓰지 않았습니다. 명나라의 홍무제나 영락제는 강력한 황권을 바탕으로 백성의 삶을 개선하고 국가를 발전시켰지만, 연산군은 오로지 자신의 사치와 향락을 위해 권력을 썼습니다. 장녹수를 비롯한 후궁들에게 막대한 혜택을 주고, 재상의 부인들까지 손을 대며, 폐비 윤씨의 제삿날에 공개적으로 성교를 나누는 등 변태적인 행동까지 서슴지 않았습니다.
결국 연산군 12년 9월 1일, 박원종·성희안·유순정 등이 주도한 중종반정(中宗反正)이 일어났습니다. 반정의 주역들은 대부분 연산군의 총애를 받았던 인물들이었습니다. 박원종은 성종과 연산군 모두에게 극진한 대우를 받았고, 성희안도 승승장구하다가 사소한 실수로 좌천당한 뒤 반정에 가담했습니다. 이들이 반정을 일으킨 이유는 단순히 연산군의 폭정 때문만이 아니라, 연산군의 변덕스러운 성격 때문에 언제 자신들도 숙청당할지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이었습니다.
반정 세력은 임사홍과 신수근을 먼저 제거한 뒤 창덕궁을 포위했고, 연산군은 거의 저항 한 번 못하고 폐위되어 강화도 교동으로 유배되었습니다. 그리고 불과 두 달 뒤, 연산군은 유배지에서 "아내가 보고 싶다"는 말을 마지막으로 남기고 죽었습니다. 일각에서는 후환을 남기지 않기 위해 누군가 독살했다는 주장도 있지만, 이를 뒷받침할 근거는 없습니다.
연산군을 단순히 폭군으로 기억하는 것은 쉽습니다. 하지만 그를 환경과 구조가 만들어낸 결과로 바라볼 때, 우리는 더 중요한 질문과 마주하게 됩니다. 재능이 있다고 해서 올바르게 자라는 것은 아니며, 어떤 환경에서 무엇을 보고 자라느냐가 결국 한 사람의 세계관을 결정한다는 사실입니다. 성종은 본인에게는 엄격했지만 아들에게는 너무 느슨했고, 그 결과 연산군은 권력을 올바르게 사용하는 법을 배우지 못했습니다. 제가 보기에 연산군의 비극은 개인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교육과 환경의 실패가 만들어낸 역사적 참사였습니다.
참고: https://www.youtube.com/watch?v=ZgWpbBt7G30
https://www.youtube.com/watch?v=Acw6sX6oAmU
https://www.youtube.com/watch?v=H3HHNMpweg0
https://www.youtube.com/watch?v=rs1rFlxJzx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