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려대학교 입시 커트라인은 줄줄이 외우면서 정작 그 학교가 어떻게 살아남았는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저도 수험생 시절 모의고사 성적표를 받아들고 고려대 점수와 제 점수를 비교하며 한숨 쉬던 기억이 납니다. 그때 비교했던 건 숫자였지, 그 학교 이름 뒤에 이런 역사가 있는줄은 단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습니다. 보성전문학교 자료를 읽으면서 학교 이름 하나가 이렇게 무거울 수 있다는 걸 처음 알았습니다.
3.1운동 독립선언서를 인쇄한 학교, 보성전문학교의 출발
1905년 5월 5일, 이용익은 보성전문학교를 설립했습니다. 여기서 이용익이란 고종 황제의 측근으로 내장원경(內藏院卿)이라는 황실 재정 담당 대신을 지낸 인물입니다. 쉽게 말해 황실의 돈을 관리하던 최고위 관리였던 셈입니다(출처: 고려대학교 박물관). 당시는 을사조약이 체결되고 나라가 넘어가던 시기였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이용익은 교육구국(教育救國)을 내세웠습니다. 교육구국이란 교육을 통해 나라를 구한다는 뜻으로, 일제 강점기 지식인들이 내세운 핵심 이념 중 하나였습니다.
저는 이 대목을 읽으면서 처음 든 생각이 이겁니다. 나라를 빼앗기는 상황에서 학교를 세운다는 게 얼마나 절박한 선택이었을까. 지금은 대학이 취업을 위한 스펙 중 하나로 여겨지지만, 당시엔 학교 자체가 저항의 수단이었던 겁니다.
보성전문학교는 법률과와 이재과(理財科) 두 학과로 시작했습니다. 이재과는 현재의 경제학과와 경영학과를 합쳐놓은 개념입니다. 1907년 첫 졸업생 51명이 배출됐는데, 전원이 관계(官界)로 진출했습니다. 국가가 의도적으로 인재를 키워낸 겁니다(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그런데 보성전문학교가 역사에 이름을 남긴 건 따로 있습니다. 바로 3.1운동 때입니다. 1919년 전국에 배포된 독립선언서가 학교 안에 있던 보성사 인쇄소에서 인쇄됐습니다. 보성사는 이용익이 학교와 함께 설립한 출판사였습니다. 독립선언서를 밤새 찍어낸 건 보성전문학교 학생들이었고, 전국으로 배포한 것도 학생들 손이었습니다.
저는 3.1운동을 배울 때 탑골공원에서 만세를 불렀다는 정도로만 알고 있었습니다. 독립선언서가 어디서 인쇄됐는지, 누가 배포했는지는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습니다. 학교 건물 안에서 밤새 인쇄기를 돌렸을 학생들을 상상하니 그 장면이 한동안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았습니다. 일본 입장에서는 이 학교가 눈엣가시였을 겁니다. 실제로 독립선언서 인쇄 사건 직후 보성사는 일본에 의해 강제 폐쇄됐습니다.
핵심 포인트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1905년 이용익이 황실 재정 지원으로 보성전문학교 설립
- 법률과, 이재과(현 경제·경영) 두 학과로 출발
- 1919년 3.1운동 독립선언서를 학교 내 보성사 인쇄소에서 인쇄
- 학생들이 직접 전국 배포에 참여
이름을 빼앗긴 학교, 경성척식경제전문학교
보성전문학교는 1915년 일제의 탄압으로 이름을 잃습니다. 일제는 「전문학교 규칙」을 만들어 재단법인이 아니면 전문학교라는 명칭을 쓸 수 없게 했습니다. 재단법인 설립에는 엄청난 돈이 필요했습니다. 당시 사립학교로서는 감당할 수 없는 수준이었습니다. 결국 보성전문학교는 보성법률상업학교로 격하됐습니다.
여기서 격하란 단순히 이름만 바뀐 게 아닙니다. 전문학교에서 일반 학교로 지위가 떨어진 겁니다. 교육 과정도 바뀌었습니다. 인문학 교육이 금지됐습니다. 일제는 조선인 학교에서 인문학을 가르치는 걸 막았습니다. 공리공론(空理空論)에 빠지지 말고 실용적인 공부만 하라는 취지였습니다. 조선인들에게 깊이 생각할 기회를 주지 않겠다는 뜻이었습니다.
저는 이 부분을 읽으면서 이름이 이렇게 중요한 것일 수 있다는 걸 처음 느꼈습니다. 지금은 학교 이름을 그냥 브랜드 정도로 생각합니다. 고려대, 연세대, 서울대, 그냥 SKY 중 하나. 취업 잘 되는 학교 중 하나. 이름이 갖는 무게 같은 건 생각해본 적이 없었습니다.
1921년, 전국의 유지 58명이 돈을 모았습니다. 총 43만 3천 원. 당시 세브란스 의전 1년 등록금이 몇백 원 수준이었다는 걸 감안하면 엄청난 금액입니다. 이 돈으로 재단법인을 만들어 보성전문학교라는 이름을 되찾았습니다. 한 사람이 낸 게 아니라 58명이 각자 갖고 있는 걸 내놓은 겁니다. 학교 이름 하나를 되찾기 위해서.
그런데 1944년, 보성전문학교는 다시 이름을 빼앗깁니다. 이번엔 경성척식경제전문학교. 척식이라는 단어는 동양척식주식회사에서 온 말입니다. 동양척식주식회사란 일제가 조선 토지를 수탈하기 위해 만든 회사였습니다. 쉽게 말해 수탈의 도구였던 회사 이름을 학교에 붙여버린 겁니다. 이 부분을 읽는 순간 소름이 돋았습니다. 나라면 그 학교에 다니면서 어떤 기분이었을까. 상상이 잘 안 됐습니다.
1945년 해방 후 9월, 보성전문학교라는 이름을 다시 찾았습니다. 1946년 8월에는 종합대학인 고려대학교로 승격했습니다. 고려라는 이름을 선택한 이유는 명확했습니다. 조선이나 한남 같은 지역명이 아니라 민족 전체를 대표하는 이름이 필요했다는 겁니다. 고려는 고구려의 기상을 담고 있고, 영문명 Korea의 어원이기도 합니다.
간송 전형필이 1932년 경영난에 빠진 보성학교를 당시 돈 60만 원에 인수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나라면 그 돈을 썼을까 생각해봤습니다. 저는 얼마 전 기부 캠페인 문자를 받고 귀찮아서 그냥 지운 적이 있습니다. 금액도 몇천 원짜리였는데. 60만 원이면 당시 집 한 채 값이 넘었을 텐데, 망설임 없이 학교를 살린 사람 이야기를 읽으면서 그 문자를 지웠던 기억이 갑자기 떠올랐습니다.
1955년 5월 5일, 개교 50주년 기념식이 열렸습니다. 이때 고려대학교 교가가 만들어졌습니다. 작사는 시인 조지훈, 작곡은 윤이상이 맡았습니다. 당시 최고의 시인과 최고의 작곡가가 만난 겁니다. 교훈도 이때 정해졌습니다. 자유, 정의, 진리. 결국(結局)을 넘어서는 보편적 이념이 필요하다는 판단이었습니다. 여기서 결국이란 목표 달성을 위한 수단이나 방법을 의미합니다. 단순히 목표만 좇는 게 아니라 과정과 가치를 중시하겠다는 뜻이었습니다.
이름 변천 과정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1905년: 보성전문학교 설립
- 1915년: 보성법률상업학교로 격하 (일제 탄압)
- 1921년: 재단법인 설립, 보성전문학교 이름 회복
- 1944년: 경성척식경제전문학교로 강제 개명
- 1945년: 보성전문학교 이름 회복 (해방)
- 1946년: 고려대학교로 승격
지금 고려대 학생들이 자기 학교 이름이 한때 경성척식경제전문학교였다는 걸 알고 있을까요. 그 이름을 되찾기 위해 수십 명이 전 재산에 가까운 돈을 냈다는 걸 알고 있을까요. 저는 이 자료를 읽기 전까지 몰랐습니다. 수능 커트라인은 줄줄이 꿰고 있으면서 정작 그 학교가 어떻게 살아남았는지는 아무것도 몰랐던 겁니다.
고려대를 목표로 몇 년을 공부한 수험생이라면, 혹은 그 학교를 다니고 있는 학생이라면 한 번쯤은 알아야 할 이야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수능 점수로만 그 학교의 가치를 재고 있었던 제 자신이 이 자료를 읽고 나서는 조금 부끄러웠습니다. 학교 이름 하나에 이렇게 많은 것들이 담겨 있었다는 걸, 이제야 알게 됐습니다.
참고: https://www.youtube.com/watch?v=NDjs5KMotuE&t=26s
https://www.youtube.com/watch?v=OdUTMmlwQcs
https://www.youtube.com/watch?v=MH3DR62HnTQ
https://www.youtube.com/watch?v=BueGnRIBPag
https://www.youtube.com/watch?v=BT3DP44frys
https://www.youtube.com/watch?v=1dUbZxQL8yI
https://www.youtube.com/watch?v=evvCALq6yRc
https://www.youtube.com/watch?v=rggn8Ut00y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