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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재학당 역사 (설립배경, 교육철학, 인재배출)

by qnwkdjaak 2026. 3. 10.

배재학당 역사

 

방 두 칸 벽을 허물어 만든 교실에서 두 명의 학생으로 시작한 학교가 있습니다. 1885년 8월 3일, 배재학당의 첫 수업 풍경입니다. 저는 학창시절 교실 에어컨이 안 나온다고 투덜댄 적이 있는데, 이 기록을 읽으면서 그때 제 모습이 부끄럽게 느껴졌습니다. 당시 조선은 과거제도가 폐지되고 외세의 침탈이 본격화되던 격동기였습니다. 이런 시기에 미국 북감리회 선교사 한 명이 서울 정동 언덕에 근대식 학교를 세웠고, 이곳에서 한국 근대사의 중요한 인물들이 배출되었습니다.

선교사 아펜젤러와 고종의 만남으로 시작된  배재학당 설립배경

배재학당을 세운 헨리 아펜젤러(Henry G. Appenzeller)는 1885년 6월 인천에 두 번째로 입국한 미국 감리교 선교사입니다. 그는 먼저 입국한 의사 스크랜튼의 집 한 채를 구입해 방 두 칸 벽을 헐어 작은 교실을 만들었습니다. 여기서 '근대식 학교'란 전통적인 서당이나 성균관과 달리 서양의 교육과정과 교수법을 도입한 교육기관을 의미합니다. 당시 이경남, 고영필 두 학생으로 시작한 수업은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중등교육의 출발점이 되었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고종이 이 학교에 보인 관심입니다. 폴크 공사를 통해 아펜젤러의 교육사업 계획을 전해들은 고종은 1886년 6월 8일 직접 '배재학당(培材學堂)'이라는 교명을 하사했습니다. '유능한 인재를 기르고 배우는 집'이라는 뜻입니다. 심지어 당대 최고의 명필 정학교에게 친히 현판을 쓰게 하고, 외무아문의 김윤식을 통해 전달하도록 했습니다(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왕이 직접 사립학교에 이름을 지어주고 현판까지 내린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습니다.

초기 운영은 순탄하지 않았습니다. 1886년 6월 개교 당시 학생은 6명이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한 학생은 시골 일로, 다른 학생은 "6월은 외국어 배우기에 부적당한 달"이라는 이유로 떠났습니다. 저는 이 대목에서 웃음이 나오면서도 당시 사람들이 서양식 교육을 얼마나 낯설어했는지 실감했습니다. 그럼에도 아펜젤러는 포기하지 않았고, 10월에는 재학생이 20명으로 늘어났습니다.

크고자 하거든 남을 섬기라는 교육철학의 실천

배재학당의 교육목표는 명확했습니다. 첫째, 기독교 정신에 기반한 인재 양성. 둘째, 근대 국가를 이끌 지도자 배출. 이를 위해 성경, 영어, 천문, 지리, 생리, 수학 등 서양식 교과목을 가르쳤습니다. 특히 학당훈(學堂訓)으로 정한 '욕위대자당위인역(欲爲大者當爲人役)'은 마태복음 20장 26-28절의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라는 예수의 가르침을 한문으로 옮긴 것입니다.

저는 학교 다닐 때 교훈을 시험용으로만 외웠는데, 배재학당에서는 이 문장이 실제 교육 전체를 관통하는 철학이었습니다. 아펜젤러는 "갈보리에서 돌아가신 주님의 피로 구원받지 않고는 유능한 인재로 양육될 수 없다"고 선교보고서에 기록했습니다. 교육은 단순히 지식 전달이 아니라 섬김의 리더십(Servant Leadership)을 체득하는 과정이었던 것입니다. 여기서 '서번트 리더십'이란 권위로 명령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섬김으로써 사람들을 이끄는 리더십 유형을 말합니다.

교육 방식도 혁신적이었습니다. 배재학당은 학생자조정책을 채택해 1888년 자조부(自助部)를 설치했습니다. 가난한 학생들이 학교 구내를 돌보고 지키는 일을 하며 학비를 벌 수 있게 한 것입니다. 수업료는 월 3량이었지만, 일할 의지만 있다면 누구나 배울 수 있었습니다. 또한 체육시간에는 야구, 축구, 정구, 농구 같은 서양 운동을 소개했고, 특별활동으로 연설회와 토론회를 열었습니다.

서재필이 지리학을 강의하면서 만들어진 협성회(協成會)는 학생들이 독립협회 활동과 유사한 토론을 펼치는 공간이 되었습니다. 당시 『독립신문』은 "배재학당 학도들이 일주일에 한 번씩 의회원 규칙을 공부하고 각색 문제를 내어 연설공부를 한다"고 보도했습니다(출처: 독립신문 아카이브). 토론 주제는 모두 근대화와 관련된 당대 최고의 화두들이었습니다. 저는 중학교 때 토론 시간이 그냥 형식적인 시간이라고 생각했는데, 배재학당에서는 토론이 시민사회 여론정치의 원리를 배우는 핵심 교육과정이었습니다.

독립운동가와 한글학자를 키운 인재배출

배재학당이 배출한 인물 명단을 보면 한국 근현대사의 주요 인물들이 총망라되어 있습니다. 대표적인 인물들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이승만: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임시정부 초대 대통령
  • 주시경: '한글'이라는 이름을 만든 국어학자, 한글문법 체계 확립
  • 지청천: 신흥무관학교 교관, 한국광복군 총사령관
  • 여운형: 독립운동가, 건국준비위원회 위원장
  • 김소월: 민족시인, 「진달래꽃」 작가
  • 나도향: 소설가

이승만의 사례는 배재학당의 교육이 한 사람의 운명을 어떻게 바꿨는지 보여줍니다. 황해도 출신인 그는 1894년 과거제도 폐지 후 출세를 위해 영어를 배우려고 배재학당에 들어왔습니다. 솔직히 저는 이 동기가 가장 공감됐습니다. 저도 영어학원을 다닌 이유가 취업 스펙 때문이었으니까요. 하지만 이승만은 그곳에서 서재필의 강의를 듣고 자유와 독립에 눈을 떴습니다. 협성회를 조직해 토론과 연설을 배웠고, 만민공동회에서 시국 연설을 할 정도로 성장했습니다.

1898년 정치범으로 한성감옥에 투옥된 이승만에게 아펜젤러는 음식과 의복을 넣어주고, 밖에 있는 그의 늙은 부모까지 돌봐주었습니다. 콜레라가 창궐해 하루 20명씩 죽어나가는 감옥에서 이승만은 "내가 죽으면 어디로 가나"라는 물음 앞에 서게 됩니다. 그때 아펜젤러의 설교가 떠올랐고, 감옥에서 성경을 읽으며 믿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6년간의 옥중생활 동안 그는 40여 명을 전도했고, 그 감옥은 '복당(福堂)', 축복의 장소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주시경의 경우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그는 배재학당에서 공부하고 졸업한 뒤 다시 교사로 돌아와 한글 연구의 기초를 놓았습니다. '한글'이라는 이름 자체가 주시경이 만든 것입니다. 그의 제자들이 조선어학회(현 한글학회)를 만들어 일제강점기 내내 한글을 지켜냈습니다. 배재학당은 1889년부터 활판소를 운영하며 한글 활자로 성경을 인쇄했고, 1897년 『조선 그리스도인의 회보』, 1898년 『협성회보』와 일간신문 『매일신문』을 발행했습니다. 한글 신문과 출판의 전초기지 역할을 한 것입니다.

1916년에는 르네상스 양식의 붉은 벽돌 건물인 동관과 서관이 완공되었습니다. 당시 서울에서 화제가 될 정도로 파격적인 건축물이었습니다. 현재 동관은 서울시 기념물 16호로 지정되어 정동에 배재학당 역사박물관으로 남아 있고, 서관은 1980년대 학교가 강동구로 이전할 때 벽돌 한 장 한 장을 옮겨 재현했습니다. 저는 이 사실을 알고 놀랐습니다. 보통은 헐고 새로 짓는데, 역사적 가치를 인정해 그대로 옮긴 것이 인상적이었습니다.

배재학당의 역사는 단순히 한 학교의 역사가 아닙니다. 한국 근대교육사이자 독립운동사이고, 한글 보급사입니다. 방 두 칸으로 시작한 학교가 140년 가까이 이어지며 배재중·고등학교, 배재대학교로 발전한 것은 교육의 힘이 얼마나 큰지 보여줍니다. 저는 이 자료를 읽으면서 학교에 다니면서 단 한 번도 그 학교가 어떻게 생겨났는지 생각해본 적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입학식 때 교장 선생님이 학교 역사 이야기를 하면 그냥 지루해서 멍하니 앉아 있었던 제 모습이 부끄러웠습니다. 교육은 누군가의 헌신과 철학 위에 세워진 것이고, 그 무게를 느끼는 것부터가 배움의 시작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참고: https://www.youtube.com/watch?v=dj3q8gKJQE4
https://www.youtube.com/watch?v=7sUYmujC0_k
https://encykorea.aks.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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