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이에게 책 좀 읽으라고 잔소리하면서 정작 제 책장에는 읽다 만 책이 열다섯 권입니다. 시작은 하는데 끝을 내본 적이 별로 없습니다. 그런데 조선시대 김굉필이라는 학자는 소학 한 권을 9년 동안 손에서 놓지 않았다고 합니다. 처음에는 이해가 안 됐습니다. 책이 귀해서였을까, 아니면 정말 그 한 권에 9년이 필요했던 걸까. 자료를 읽으면서 제가 책을 읽는 건지 소비하는 건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김굉필의 공부법 30세까지 소학만 읽은 이유
일반적으로 공부 잘하는 사람은 많은 책을 빨리 읽는다고 알려져 있지만, 김굉필의 방식은 정반대였습니다. 그는 21세에 스승 김종직을 찾아가 소학을 처음 받았고, 30세가 될 때까지 다른 책을 거의 펴보지 않았습니다(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여기서 소학이란 송나라 주희가 편찬한 유교 기초 교재로, 일상의 예절과 도덕적 실천을 담은 책입니다.
제가 직접 소학 원문 일부를 찾아 읽어봤는데, 요즘 자기계발서처럼 거창한 이론이 나오는 게 아니라 아침에 일어나서 세수하고 옷 입는 법, 어른 앞에서 말하는 법 같은 아주 기본적인 내용이었습니다. 솔직히 이걸 9년씩 읽어야 하나 싶었습니다. 그런데 김굉필은 "소학 속에서 어제의 잘못을 깨달았다"고 했습니다. 매일 읽으면서 자신의 행동을 점검한 겁니다.
김종직은 제자 김굉필에게 "새벽에 닭이 울 때 일어나 세수하고 앉아서 책을 읽는다"며 꾸준한 실천을 강조했습니다. 김굉필은 처음에는 힘들었지만 매일 새벽 기상을 반복하다 보니 나중에는 닭이 울지 않아도 저절로 일어나게 되었다고 합니다. 독서량(讀書量)이 아니라 체화(體化) 정도가 중요하다는 걸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여기서 체화란 지식을 머리가 아닌 몸으로 익혀 자연스럽게 실천하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저는 작년에 독서 챌린지에 참여해서 한 달에 열 권씩 읽겠다고 다짐했는데, 정작 기억에 남는 문장은 하나도 없습니다. 김굉필처럼 한 권을 반복해서 읽으며 제 삶에 적용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가 스스로를 '소학동자'라고 부른 이유는 평생 초심을 잃지 않겠다는 다짐이었던 것 같습니다.
주요 학습 원칙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반복 정독을 통한 내용 체화
- 매일 새벽 일정한 시간에 학습
- 읽은 내용을 즉시 일상에서 실천
- 자신의 행동을 매일 점검하고 반성
유배지에서도 멈추지 않은 배움
일반적으로 유배는 정치적 생명이 끝나는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김굉필에게는 오히려 학문을 깊이 있게 전수하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1498년 무오사화로 평안도 희천에 유배된 그는 그곳에서 조광조를 만나 가르쳤습니다. 여기서 사화(士禍)란 사림파 학자들이 정치적 이유로 집단 숙청당한 사건을 뜻합니다.
제가 조금만 환경이 불편하면 집중이 안 됩니다. 카페가 시끄러우면 다음에 하자고 미루고, 집에 손님이 오면 그날은 아예 포기합니다. 그런데 김굉필은 유배라는 극한 상황에서도 제자를 받아들이고 학문을 이어갔습니다. 처지가 문제가 아니라 마음가짐이 문제라는 걸 보여준 셈입니다.
1504년 갑자사화 때 그는 결국 순천 유배지에서 51세로 사형당했습니다. 죽음을 앞두고 남긴 말이 기록에 남아 있습니다. "아직도 닦아야 할 학업이 남아 있음이 무척이나 아깝도다." 마지막 순간까지 배움을 놓지 않았던 사람의 진심이 느껴집니다(출처: 문화재청).
솔직히 이 문장을 읽고 한참을 멍하니 앉아 있었습니다. 저는 오늘 저녁 드라마가 재밌어서 내일 공부하겠다는 사람인데, 죽는 순간까지 배움이 아깝다고 느끼는 사람과 같은 인간이라는 게 좀 당혹스러웠습니다. 김굉필의 제자 조광조는 스승에게서 배운 실천 중심의 도학(道學)을 바탕으로 중종 때 급진적 개혁을 추진했습니다.
김굉필이 유배지에서 가르친 주요 제자들:
- 조광조: 기묘사화의 중심인물, 도학 정치 실현 시도
- 김안국·김정국 형제: 성리학 교육과 보급에 기여
- 이심원: 주계정으로 불리며 후학 양성
500년 뒤에도 인정받은 이유
일반적으로 정치적 희생자는 시간이 지나면 잊힌다고 알려져 있지만, 김굉필은 사후 100여 년이 지나서야 문묘에 배향되었습니다. 1610년 광해군 때 정여창, 조광조, 이언적, 이황과 함께 '동방오현(東方五賢)'으로 성균관 문묘에 종사된 겁니다. 여기서 문묘종사란 공자를 모신 사당에 함께 배향되는 것으로, 유학자에게 최고의 영예를 의미합니다.
퇴계 이황은 김굉필을 '근세 도학의 조종(祖宗)'이라고 평가했습니다. 조선 성리학의 계보가 정몽주-길재-김숙자-김종직-김굉필-조광조로 이어진다고 본 것입니다. 이 학통은 이후 이이, 성혼으로 연결되면서 서인 학파의 뿌리가 되었습니다.
제가 이 부분에서 흥미로웠던 건 김굉필이 스승 김종직을 공개적으로 비판했다는 점입니다. 1484년 김종직이 이조참판에 오르자 김굉필은 시를 지어 "높은 자리에 앉아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고 풍자했습니다. 요즘이라면 SNS에서 난리가 났을 만한 일입니다. 그런데 제가 직장에서 윗사람의 말이 틀렸다고 생각하면서도 그냥 넘긴 적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 불편해지기 싫어서입니다.
김굉필의 학문이 후대에 미친 영향:
- 조광조를 통한 기묘사림 개혁정치의 사상적 기반 제공
- 이이·성혼으로 이어지는 기호학파 형성의 출발점
- 소학 중심 교육을 통한 실천적 성리학 확산
그런데 여기서 비판적으로 볼 지점도 있습니다. 김굉필의 급진적 도덕주의는 현실 정치에서 충돌을 일으킬 수밖에 없었습니다. 조광조가 기묘사화로 실패한 것도 이상과 현실의 괴리를 메우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완벽한 도덕 국가를 꿈꾸는 것과 실제 정치에서 타협하는 것 사이의 균형을 어떻게 잡을 것인가는 지금도 유효한 질문입니다.
아이에게 공부하라고 말하기 전에 제가 맡은 일에 대해 김굉필처럼 책임을 다하고 있는지 먼저 돌아봐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배움은 시작하는 것보다 계속하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마흔이 넘은 나이에 500년 전 사람한테 배웠습니다. 소학동자의 마음으로 돌아가 한 권을 제대로 읽어보는 것부터 다시 시작해야 할 것 같습니다.
참고: https://www.youtube.com/watch?v=tmAFK-pCJ6w
https://www.youtube.com/watch?v=An8v557LBz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