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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장각 설치 (정조 지식전략, 초계문신, 편찬 사업)

by qnwkdjaak 2026. 3. 26.

규장각 설립

 

솔직히 저는 규장각이라는 단어를 수십 번은 들었을 겁니다. 교과서에도 나왔고, 사극에서도 나왔고, 창덕궁에 직접 가본 적도 있습니다. 그런데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제가 기억하는 건 후원의 연못이 예뻤다는 것뿐이었습니다. 규장각 건물 앞을 지나쳤는지조차 몰랐고, 안내판을 읽었는지도 기억이 없습니다. 그냥 오래된 건물 중 하나였으니까요.

이덕무를 공부하다가 규장각이 계속 따라붙었고, 어쩌다 보니 규장각 자체를 파고 있는 제 자신을 발견했습니다. 그리고 알면 알수록 제가 알던 도서관이라는 이미지가 얼마나 단순했는지 깨달았습니다.

규장각 설치 25세 왕 정조가 선택한 지식 전략

정조가 규장각을 설치한 건 1776년, 왕위에 오르던 바로 그해입니다. 즉위하자마자 만들었다는 건 즉흥적 결정이 아니었다는 뜻입니다. 정조의 아버지는 사도세자였습니다. 뒤주에 갇혀 죽은 그 사람. 정조는 열한 살에 그 장면을 직접 목격했고, 왕위에 오른 뒤에도 그 죽음을 주도했던 노론 벽파 세력에 사방이 둘러싸여 있었습니다(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저는 이 부분을 읽으면서 잠깐 멈췄습니다. 아버지가 그렇게 죽는 걸 두 눈으로 본 아이가, 그 아버지를 죽인 사람들과 매일 조정에서 마주쳐야 했다는 겁니다. 직장에서 나를 힘들게 했던 사람과 같은 공간에 있어야 할 때도 버티기 힘든데, 그 상대가 아버지를 죽인 세력이라면 어땠을까요. 저 같았으면 버티지 못했을 것 같습니다.

정조는 버텼습니다. 그리고 버티는 방식으로 규장각을 선택했습니다. 무력이 아니라 지식으로 자기 세력을 만들겠다는 발상이었습니다. 기존 관료 체계를 통하면 노론의 눈치를 봐야 했으니, 그 바깥에 완전히 새로운 판을 깔았습니다. 겉으로는 왕실 서고이자 학술 기관이었지만 실제로는 왕의 친위 두뇌 집단을 육성하는 공간이었습니다. 여기서 왕권 강화란 단순히 권력을 키우는 게 아니라, 개혁 정치를 뒷받침할 세력 기반을 확보한다는 의미입니다.

저는 직장 생활을 하면서 기존 조직 안에서 뭔가를 바꾸려면 에너지의 절반이 내부 저항을 설득하는 데 쓰인다는 걸 느꼈습니다. 보고서 하나 올리는 데도 윗선 눈치를 봐야 하고, 새로운 방식을 제안하면 왜 기존 방식을 바꾸냐는 말이 먼저 나왔습니다. 그럴 때 영리한 사람들은 기존 판 옆에 조용히 새 판을 깝니다. 정조가 250년 전에 그 방식을 쓴 겁니다. 규장각은 승정원이나 홍문관 같은 기존 관청의 타성을 우회하여 정조가 직접 신임하는 인재들을 육성하는 혁신정치의 중추기구였습니다(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규장각의 구조를 보면 그 의도가 더 명확해집니다. 창덕궁 내 봉모당에는 영조의 어필과 어제를 봉안했고, 이문원은 사무 청사로 기능했습니다. 1781년에는 청사를 도총부 옛 건물로 옮기고 강화도에 외각을 신설했습니다. 내규장각에는 서고, 열고관, 개유와 등 부설 장서각을 세워 국내외 도서를 체계적으로 정리했습니다. 장서는 청나라에서 구입한 『고금도서집성』 1만여 권을 포함해 약 8만여 권에 달했습니다. 이는 단순한 책 보관이 아니라 지식 인프라 구축 작업이었습니다.

초계문신과 서얼 검서관 

규장각에서 가장 파격적이었던 건 초계문신 제도였습니다. 초계문신이란 37세 이하 젊은 관료 중 학문적 역량과 미래 가능성이 돋보이는 인재를 선발해 정조가 직접 교육하고 토론하는 제도입니다. 이미 과거에 합격해 관직에 오른 사람들을 또 공부시키는 거였으니 당사자들 입장에서는 반가운 일이 아니었을 겁니다. 저도 입사하고 나서 또 시험을 보라고 하면 황당했을 것 같거든요. 그런데 정조는 개의치 않았습니다.

더 파격적인 건 그다음이었습니다. 서얼 출신들에게도 검서관이라는 직책으로 규장각의 문을 열었습니다. 검서관이란 규장각 소장 서적을 조사하고 편찬 활동을 보조하는 역할로, 서얼에게 개방된 최초의 관직이었습니다. 이덕무, 박제가, 유득공이 바로 그 자리로 들어온 사람들입니다.

저는 이 대목에서 괜히 마음이 찡했습니다. 능력이 있어도 연줄이 없으면 기회가 오지 않는다는 걸 몸으로 느껴본 적이 있어서입니다. 열심히 준비했는데 결국 아는 사람이 있는 쪽으로 기회가 돌아가는 걸 보면서 허탈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래도 저는 문이 잠겨 있던 게 아니었습니다. 이덕무 같은 서얼 학자들은 법으로 처음부터 막혀 있었습니다. 아무리 잘해도 신분 하나로 처음부터 천장이 정해져 있던 사람들에게 규장각 검서관 임명이 어떤 의미였을지는 길게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 같습니다.

정조는 초계문신 강제에서 매월 두 차례 시험을 치러 상벌을 내렸습니다. 여기서 강제란 경전 강의와 시험을 통한 재교육을 뜻합니다. 규장각 각신들은 시관이 되어 초계문신을 지도했고, 이는 정조 친위 세력 확대에 크게 이바지했습니다. 정약용이 바로 초계문신 출신이었고, 관료로서 승승장구하며 정조의 최측근 참모로 활동했습니다.

규장각 관원 구성을 보면 제학 2인, 직제학 2인, 직각 1인, 대교 1인 외에 검서관 4인이 있었습니다. 각신들은 삼사보다도 청요직으로 인정받았고, 승지 이상으로 왕과 친밀했습니다. 당직을 서면 아침저녁으로 왕에게 문안했고, 왕의 언동을 기록하는 사관 역할까지 했습니다. 1781년부터는 일기를 기록해 『내각일력』을 편찬했는데, 『승정원일기』보다 상세했다고 합니다(출처: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편찬 사업과 문화 중흥 

규장각의 장서는 최대 8만여 권에 달했는데, 그중에는 청나라에서 수입한 『고금도서집성』 1만여 권이 포함돼 있었습니다. 이 부분을 읽다가 잠깐 멈췄습니다. 당시 조선에서 청나라는 오랑캐로 불리던 나라였습니다. 병자호란의 치욕이 채 가시지 않은 시절이었고, 청나라 사람을 만나도 속으로 침을 뱉는 게 애국적인 행동으로 여겨지던 분위기였습니다. 그런 나라의 책을 왕실 도서관에 통째로 들여놓는다는 건 요즘으로 치면 국민 정서에 정면으로 역행하는 결정이었습니다. 실제로 청나라 문물을 배워야 한다고 주장했던 박제가가 주변에서 얼마나 심한 비판을 받았는지를 보면, 정조가 이 결정을 얼마나 강하게 밀어붙여야 했는지 짐작이 됩니다. 자존심보다 실용을 택한 겁니다.

편찬 사업의 규모도 놀라웠습니다. 무예 기술을 집대성한 군사 실용서 『무예도보통지』, 조선의 법전을 정비한 행정 지침서 『대전통편』, 역대 국왕의 언행을 기록한 역사서 『국조보감』, 정조의 시문과 정책을 모은 문집 『홍재전서』, 정조가 직접 작성한 국정 일기 『일성록』까지. 군사에서 법, 역사, 문학을 가리지 않았습니다. 처음 이 목록을 봤을 때 저는 단순히 책을 많이 만들었구나 싶었는데, 자료를 더 읽다 보니 이게 단순한 편찬 작업이 아니었습니다. 규장각 학자들은 책을 만들면서 동시에 실제 정책 입안에도 깊이 관여했습니다. 요즘으로 치면 싱크탱크와 행정부가 한 지붕 아래 있는 구조였던 겁니다.

정조는 법고창신, 즉 옛것을 모범 삼아 새것을 창출한다는 방향 아래 편찬 사업을 추진했습니다. 이 말이 처음에는 그냥 멋있어 보이는 한자어 정도로 들렸는데, 실제로 규장각이 어떻게 운영됐는지를 알고 나니 그게 단순한 구호가 아니었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청나라 서적을 수입하고, 조선의 제도를 재정비하고, 그 결과물로 새로운 활자까지 만들어냈으니까요. 출판 기능을 위해 예조 소속 교서관을 속사로 삼고 정유자(1777년), 한구자(1782년), 생생자(1792년), 정리자(1795년) 등 새로운 활자를 만들어 수천 권의 서적을 간행했습니다. 이덕무는 이 출판 사업의 핵심 역할을 맡았고, 간서치라는 별명답게 책 속에 파묻혀 살았습니다. 정조는 또 김홍도, 신윤복 같은 예술가도 후원하며 조선 고유 문화를 정립해나갔습니다.

정조 사후, 남은 것과 사라진 것 

1800년 정조가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습니다. 49세였습니다. 자료를 읽다 이 부분에서 저도 모르게 손이 멈췄습니다. 24년 동안 공들여 만든 구조가 결국 한 사람의 생명에 달려 있었다는 사실이 너무 허망했습니다. 정조 사후 규장각은 형태는 유지됐지만 기능은 빠르게 쪼그라들었습니다. 개혁의 동력이 빠진 자리에 안동 김씨, 풍양 조씨 같은 세도 가문이 채워 들어왔고, 정치적 선도 기구로서의 역할은 예전과 같지 않았습니다.

예전에 다니던 회사에서 비슷한 걸 본 적이 있습니다. 좋은 팀 문화를 만들어놓은 팀장이 갑자기 다른 부서로 발령 나고 나서, 그 팀이 반 년 만에 완전히 달라지는 걸 옆에서 지켜봤습니다. 제도는 그대로였고 사람도 그대로였는데, 그걸 살아있게 했던 사람 하나가 빠지니까 전부 흐지부지됐습니다. 규장각도 그랬습니다. 제도가 약해서가 아니라 그 제도에 숨을 불어넣던 사람이 사라진 겁니다.

규장각은 1868년 경복궁 중건 때 창덕궁에서 경복궁으로 옮겨졌고, 소장 도서는 이문원, 집옥재, 시강원 등에 분산 보관되었습니다. 1894년 갑오개혁으로 궁내부 소속이 되었다가 1895년 규장원으로, 1897년 다시 규장각으로 개칭되었습니다. 1910년 경술국치로 폐지된 뒤 도서는 조선총독부를 거쳐 경성제국대학으로 넘어갔고, 광복 후 서울대학교가 인수했습니다. 현재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이 규장각 도서 약 20만 권을 보관하고 있습니다.

이 이야기를 다 읽고 나서 창덕궁을 다시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때 무심코 지나쳤던 주합루와 부용지 일대를 이제는 다른 눈으로 볼 수 있을 것 같아서입니다. 같은 공간도 그 안에 담긴 맥락을 알고 나면 전혀 다른 곳이 됩니다. 그냥 오래된 건물이 아니라, 아버지의 죽음을 목격한 왕이 살아남기 위해 지식으로 쌓아 올린 요새라는 걸 알고 나서는요.

참고: https://www.youtube.com/watch?v=i0qMees8Wa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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